마지막 우상 내 자아 / 김철기

묵상/Word-God|2019. 5. 4. 21:44

 

우리 교회 형제 중에 브라질 육군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근무하는 35세의 형제인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는 모든 남방과 티셔츠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SOLI DEO GLORIA”

라는 글자를 새겨서 입고 다닙니다.

 

전에는 모든 영광을 내가 받으려고 하였지만

이제는 절대로 내가 영광을 받지 않고 주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겠다!

얼마나 훌륭한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시 형제가 그 글씨를 바라보면서

나는 주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어느 순간,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런가? 아니다. 내가 잘하고 있다.’

이 생각과 함께 본인의 자랑과 교만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 선한 것이 나쁜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요?

죄인인 내가.. 내가 문제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이 선한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함이 문제입니다.

맞습니까?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을 거절하는 사람들

 

C. S. 루이스가 쓴 <거대한 결별>이라는 책에 보면

한 무리의 지옥 거주자들이 천국 부근으로 소풍을 나와서

만일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한 유령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에 있을 때의 자기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은 그래도 괜찮게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적이었다거나 완벽했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훌륭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권리가 아닌 것은,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지옥에서 사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보기에 그래도 괜찮고,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너무 비슷한 그런 고백 아닙니까?

 

자기 의는 어떤 것인가요?

 

내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자녀로서, 기독교인으로서,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

내가 이룬 성취가 .. 자기 의로 둔갑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 결정을 내릴 때 잘했다

하며 스스로에게 점수를 줍니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눈물로 밤을 새우며 이룬 업적 공로를 생각하면

뿌듯한 보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선교비 보내고, 십일조, 새벽기도, 철야기도,

이런 종교적인 성취에 의한 보람은 더 큽니다.

 

이런 성취들로 인해

나는 이런 (대단한, 남다른) 사람이다.’ 라는 식의

자기 존재감, 또는 자존감으로 형성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존감은

사실은 내 선함과 내 가치를 인정하면서, 자기 의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으므로

경건하고 열심 있다는 성도님들은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수여하시는 그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지 않고

내 가치를 인정하고 내 선함, 내 공로, 업적으로 탑을 쌓아갑니다.

자존감이 점점 커집니다.

 

세상은,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당당하고, 대접받고, 손해를 보지 않고

열등의식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자존감이 지나치게 높을수록

하나님과는 원수가 됩니다.

 

그럼 자존감이 낮으면 덜 문제아인가요?

마찬가지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것은

또 다른 열등의식의 피해자로

자기연민의 감옥, 다시 말해서 자아가 죽지 못하고,

자기 자아의 감옥에 갇혀서.. 스스로 괴롭게 살아갑니다.

 

왜 우리가 자기 의를 쌓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로마서 3:22~28절을 줄여서 말씀 드립니다.

인간은 모두 죄를 범해서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은혜로 거저 주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용서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의를 옷 입혀 주시고

천국에 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거절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십자가 보혈의 가치를

내 가치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함과 공로와 업적에

내 의를 같은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그 어떤 것이 없음에도

십자가에 흘린 그 피로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됩니다.

 

그럼 그 결과는 내가 내 공로와 선함과 업적으로

천국에 가겠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 의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자기를 의롭다고, 훌륭하다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몇 달, 몇 년 계속 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내 삶에서 주님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너무 심한 표현 같습니까? 그런데 사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자기 의를 쌓게 되는가요?

 

1. 너무 자연스럽게 자기 의는 쌓여집니다.

우리는 동기가 순수하면, 모든 게 선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떤 이유나 어떤 계산도 없었습니다. 순수하였습니다.

 

우리교회 교인 육군 대위가 모든 티셔츠와 남방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라고 수를 놓아서 붙이고 다니는

그 군인 형제의 동기가 순수합니까/악합니까? 순수합니다.

 

동기가 순수하였을 때,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있다. 뿌듯한 보람을 경험하는 순간,

내가 선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를 떠나십니다.

 

이것은 구제할 때도, 전도할 때도,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내 자신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때.. 우리는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죄 값을 전가시켜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면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그 초라한 자기 의 때문입니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조금 잘 믿는다는 사람들은, 내 스스로 내 선함과 가치를 인정합니다.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그 상한마음의 자리인데

우리는 쉽게 거기를 떠나서

자기 의와 자랑의 덫에 걸려듭니다.

 

주님께서도 마19:17에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만 선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도 이런 면은 선하다고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챕니다.

 

학교와 교회는 우리가 선하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 가치들이

우리 인생의 기둥 같은 역할들을 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인생을 살았느냐가

이 가치들을 얼마나 잘 성취하였느냐의 기준이 됩니다.

맞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성경적 가치관은,

그런 차원을 세상적 선한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합니다.

 

제 경우를 보았을 때, 구원받은 후에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순수하게 행하던 열심과 헌신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되게 사는구나!’

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순수하다 이것은 내가 마땅히 주님께 드리는 충성이다.’ 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모든 일반 회사원, 상인, 가정주부, 기업인, 공무원, 학자,

모두 순수하게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하여,

또는 자아실현을 위하여 순수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누가 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당연히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순수한 노력과 열심이 쌓일 때, 우리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이 자부심과 긍지가 바로 자신을 뿌듯하게 만듭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인정합니다.

스스로 봐도 내가 대견스럽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나를 못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경멸스럽게 보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 얼마나 순수합니까?

 

회개하는 것, 아무도 악한 동기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마저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회개한다, 회개했다 라는 그 지점에서

자기 의가 쌓여져 갈 수도 있습니다.

 

곧 자신의 선함이

천국 문을 열수 있으리라고 믿는데,

그건 본의 아니게,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거절하는 결과가 됩니다.

 

회개 .. 얼마나 순수합니까! 회개해야죠!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서도..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아니면 회개하고 나서.. 회개했다는 자기 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더라도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합니다.

 

남미의 아마존은 사람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는 환경입니다.

덥고, 습도가 높고, 무는 벌레 들이 많아서

현실 속에서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살던지,

도망을 가던지..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늘 마음속에 내 사역이 헛고생이 되면 안 돼,

나 한 사람 까닭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는가!’

 

그래서 아내와 자식들, 후원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게

아주 전투적으로 치열하게 사는 것이, 제게 익숙하여졌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사역하는 것, 정직한 것,

충성스러운 것, 헌신적이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인디오 형제들과 같이 비가 새는 집에서 수년을 사는 것,

 

교인 중에 한 가정도 슬라브집이 없고 모두 양철집에 거주하므로

선교사인 저도 그들과 같이 양철집에서 살고

모든 것에 절제하고

 

세상에 이름이 알려질까 봐 그렇게 많이 받았던 방송출연과

다큐멘타리 제작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디오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약속을 하면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에도 스피드 보트로 아마존 강을 달렸습니다.

 

만일 칠흑 같은 그 밤에 보트가 전복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끔 함께 하였던 단기 팀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런데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해 듣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인디오 형제들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진짜 선교사로 살고 사역하는 것,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더 충성하고 더 헌신하고 싶었습니다.

 

내 한 몸을 부셔서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다면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 십 년 시간이 지나면서

사역도 커지고 열매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어느 틈엔가 내가 잘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여지고

그렇지 못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제 안에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내를 잃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빛을 비추시니

그렇게 내가 충성하며 치열하게 살며 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주님을 대적하는 모두 악하고 악한 것이었음을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열심과 헌신으로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주님을 섬기면서도

늘 자신을 부인하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열심, 내 헌신, ‘내 자랑과 내 공로가 될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십자가의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부인하는 꼴이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서 집을 나갔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첫째 아들이 선합니까, 악합니까?

 

둘째는 패륜아 이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고,

첫째는 인정받을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 첫째 아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실하게 아버지를 도왔다는 자의식,

자기 의가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주님을 믿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그렇게 시작하였는데

 

내가 주님을 기쁘시려고 무엇인가를 했을 때

겸손이 점점 줄어들고

자기 자랑과 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0:3절에 유대인들이 힘써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였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또는 순종한다는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 독사의 새끼, 회칠한 무덤,

너희는 입술은 가까우나 마음은 내게서 멀다!’ 라고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 장로

서기관은 신학교수

사두개인은 사회지도층, 지배계층입니다.

 

사실은 오늘날 21세기에도,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교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의 자존심을 밟아버리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죽여버리자는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9:30~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유대인들은 그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으로,

무엇을 한다는 그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 당시 찌질이처럼 살았던 창녀 세리들은

자기 의를 버리고 단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여서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3. 늘 비교하며 우위를 가리기 때문에 자기 의가 쌓입니다.

 

여러분은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까?

누군가 고의적으로 아니면 무심코 던지는 말 또는 표정으로부터 상처를 받습니까?

 

우리가 주님 밖으로, 세상으로 나가면

마귀는 곧 상처를 줍니다. 상처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저희 교회는 매년 부활절 아침에 전 교인이 아침식사를 같이 합니다.

올해 부활절 아침에 제가 아침식사 하는 의미를 소개하면서

빵을 손으로 집었더니 옆에 있던 교인 여의사가

더러운 손으로 빵을 집지 마세요, 장갑을 끼고 집으세요.”

 

그 순간 모든 교인들이 충격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찰나, 제가 웃으면서

이 손은 더러운 손이니, 여러분은 장갑을 꼭 끼고 빵을 집으세요.’

여의사의 말에 동의한 것이지요. 그렇게 넘겼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그 여의사가 그렇게 말했다면, 뒤집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내 손을 더러운 손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물질은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난은 일만 악의 뿌리다.’ 라면서

그래서 모두 부를 가져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내 물질, 권력, 지식, 종교적인 헌신 누가 누가 잘하나?

자기 의가 커질수록 자아가 확장되고 자존심이 커집니다.

 

어디에서나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어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고 대접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에게서 가족들에게서 친구들에게 교회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왜 자기를 몰라주고 인정해 주지 않는 섭섭함 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고의적으로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상처가 되는 표정이나 말을 할 때,

나는 사실 그 사람이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상처를 받겠습니까? 받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살해한 죄인이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세상에 없다 생각하면,

십자가 그늘 밑에 숨어 있으면, 주님 안에 있으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밖에 나가면

마귀가 쏘는 독화살을 매번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훌륭하다. 그런데 누가 내게 감히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표정을 지어?’

그래서 상처를 받습니다.

 

나를 인정하여 달라고 물질도 명예도 종교적인 헌신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우위를 가리므로 자기 의를 쌓아갑니다.

 

가끔 자주, 우리는 세상에 뭇욕을 먹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누구보다는 낫다.

 

C. S. 루이스가 쓴 <거대한 결별>에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는 말처럼

'나는 그래도 괜찮게 살고 있다. 완전히 신앙적이거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훌륭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줍니다.

 

이렇게 우열을 비교함으로 자기 의를 쌓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알아달라고

온갖 몸짓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자기 의는 자아의 기본요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 의는 커질수록 더 교만하여 커집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짓밣는 일이다.

그래서 주님이 결코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의를 거절 할 수 있는가요?

 

나는 죄인이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무엇을 하여도 선을 이루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서 또는 선을 행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왜 죽으셨겠습니까?

내가 주님 앞에서 뭘 한다는 것이 모두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 율법을 폐기하라는 말인가요?

회개, 선교, 교회 행사, 하지 말라는 것인가요?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행할 때,

아벨이 제사를 지낼 때 가졌던 그 마음,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이 동물이 대신 죽는다.’

그 미안함 죄송함 감사를 품고 모든 일을 하십시오.

 

주님이 복음서에서 종이 주인과 같이

일하고 돌아와서 상을 차리고 시중을 들고 난 후에라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라고 가르쳐 주셨듯이

 

제가 그 무엇을 한다 한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는 전혀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십시오. 그럼 자기 의가 쌓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안함과 감사함만 더 쌓입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였던

그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음 상한마음을 유지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더 높임을 받으십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하면 우리가 산 제물로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결코 자기 의를 쌓으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밤에 마귀가 가라지를 뿌리고 갔듯이

자기 의는 쌓여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말로다 할 수 없는 사랑,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자기 의를 깨뜨려 주시러 찾아오십니다.

 

어떻게 우리 의를 깨주러 오시는가요?

고난으로 찾아오십니다.

 

고난이 오면 우리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생깁니다.

 

82세된 장로님께서 30년 가정예배를 드리셨답니다.

병원에 가셔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퇴원하셔서 집에 들어오시는데

거실에 있던 성경을 보자 그 성경을 패대기를 치고 싶으셨답니다.

 

‘30년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예배 드렸는데

내게 고작 이런 대접을 해주십니까?’ 하며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고 충성하고 헌금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선교비를 보내고

눈물로 회개를 하나님 사랑한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였는데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내게 갚아주셔? 뒤집어 집니다.

 

이런 경험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그때 우리 숨겨졌던 악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비로소 그때 우리 악함이 공개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서 한 것이었구나.

나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구나.

내가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았구나.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다는 것들이 모두 내 왕국을 건설하는데 쓰임을 받았구나.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과 원수로 살았구나.’

 

그때 하늘이 노랗게 변함을 느낍니다.

그때 가장 진실된 회개가 나옵니다.

 

이 깨달음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상입니다.

믿으십니까?

 

저와 33년을 함께 하고 지금은 아마존의 가장 큰 별이 되어 하늘에 떠 있는

아내 허운석 선교사는 2006 11월 폐암진단을 받고

이 폐암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보상이라고 기뻐하였습니다.

 

허 선교사가 말기 암 통증을 품고 자기 생명을 소진하면서 설교했던 그 내용들을

책으로 만든 <내가 왕 바리새인입니다> 책을 읽으셨습니까? 꼭 읽으십시오.

 

이제 곧 두 번째 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기도하여 주십시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자기 의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고난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방문을 받고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감사하시고 기뻐하십시오.

그러니 지금의 고난을 받으시면서

주님, 저의 의를 깨트려 주십시오.

제 자아를 완전히 죽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님께서 지금까지 내가 행했던 모든 것은 악하고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은 내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구나.

내가 한일은 죄밖에 없었구나.’

라고 깊이 회개하도록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의무들은 수없이 찬란한 죄들과 같다.

우리는 죄에 넌더리를 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의무와 성과들까지도 메스꺼워 해야 한다.

 

먼저 마음의 깊은 회심이 있어야만

당신 마음에서 마지막으로 꺼내야 할 우상 <자기 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깊은 회개가 있어야

비로소 <마지막 우상인 자기 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시고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시기를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자기 의가 없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자기가 하였던 모든 것을 자기가 하였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그런 기억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 의가 다 깨지면 주님만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내 인생이 망한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내가 망하지 않았으면

내가 천국에 못가고 스스로 지옥을 택하여 갔겠구나.

내게 주어진 이 고난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려 했던 보상이구나.’

그때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이런 감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홀로되신 분들이 계십니까?

제 인생에, 제가 50대 후반에 홀아비가 되리라 생각을 했겠습니까?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제 인생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다른 분들에게 부담을 주는 초라한 홀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서 자기 의가 깨지니.

슬프게 하셔서 아프게 하셔서 외롭게 하셔서 울게 하셔서

천대 받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자기 의가 깨진 사람은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생각하니 언제나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사랑할 분이 그분밖에 없으므로

3:3말씀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분과 함께 걸어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생애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주님 안에서 인생 최고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과의 동행으로 인한 행복입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실제가 되어 저를 평안과 감사와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저처럼 홀아비가 되지는 마시고

제게 있는 이런 행복한 날들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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