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과 능력보다 죽는 게 우선이다(스크랩)

일반교회|2019. 5. 6. 20:48

제목만 들으셔도 무슨 뜻인지 금방 다 파악을 하셨을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누구든지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신앙고백 후에, 두 갈림 길이 있습니다.

 

마16장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 신앙고백을 한 이후에,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을 책망하여 도리어 그 길을 가시지 말라고

이렇게 주님께 한 수 가르쳐 주었을 때, 오히려 베드로는 마귀가 될 뻔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런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한 이후에 두 갈림길이 있다는 것이에요.

 

-신앙고백 후에..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신앙고백 후에.. 여전히 육신적인 생각으로 샤머니즘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에서 잘 되고 출세하려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적에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렇게 책망 하십니다.

 

정직하게 오늘 우리 현실을 바라 볼 적에,

교인들 가운데에서도 신앙고백은, 교인이 된 이상 100%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했지만,

-그 이후에 십자가의 길을 가느냐.. 가는 사람은 과연 몇 %가 되겠는가요?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 합니다.

“열심과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라고 말 합니다. 설교제목

 

아무리 자기가 열심을 갖고 있고, 또 자기가 능력까지 있어요.

리더십의 능력, 조직력의 능력, 자원 동원의 능력, 언어와 지식의 능력 등

열심도 있고 + 능력까지 있으면.. 얼핏 보면, 완벽하게 준비된 사역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에 죽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사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능력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교회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뭐 교회를 위해서, 또 주님을 위해서,

(사실은 자기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렇게 막 의욕적으로

자기가 가진 어떠한 세상 경력,

세상에서 이때까지 공기업에서 갈고 닦은 능력,

이런 것을 총 동원해서,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데..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지 않고, 자기 능력을 발휘하다가는..

대부분 다 마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죄송하지만, 더 마귀의 길을 유능하게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봉사가,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정말 많습니다.

십자가에 자아가 못 박히지 않았을 때.. 마16장의 베드로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욕도 있어야 되고, 능력도 있어야 되요.

여기서 말하는 의욕은, 세상 의욕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의욕,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욕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철저히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명백히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을 한 이후에,

비로소 <십자가의 길>을 명백히 가르치셨는데요..

 

마16:21 “이 때로부터 (신앙고백 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즉,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지식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베드로가 한 번, 십자가에서 죽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하시는데요..

 

 

◑베드로의 십자가 경험

 

제자들의 신앙 고백 후에,

예수님은 비로소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시고

실제로 또 베드로를 한번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그게 뭔가 하면,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예수님이 그냥 방치하셨다고 할까요?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닭 우는 소리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미리 내다보셨어요.

그렇게 해서 베드로 보고 미리 사전 경고의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뻔히 베드로가 넘어질 줄 알고, 사고 칠 줄 알았으면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맨투맨 감시하시고, 다른 제자들을 붙여서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사전에 조금 막아주셨더라면

어쩌면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주님은,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고요. 책임 전가도 아니고요.

 

모든 게 베드로 자신의 전적인 잘못이지만

<주님이 적극적으로 그것을 막아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포함한 우리 모든 인간의 어떠한 실수와 연약함..

그 뒤에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성으로 인해서, 자기 책임으로 넘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뒤에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는데요..

그게 뭔가 하면.. (계속 살펴 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어요.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2

 

앞일을 다 내다보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그렇게 기도를 하시면서도,

베드로가 그냥 살짝 넘어지도록, (가룟 유다처럼 완전히 넘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예수님이 허락하신 이유는 뭔가 하면

‘너도 한번 십자가에 죽어봐라!’ 이렇게 하신 것이죠.

 

표현이 조금 삭막하지만.. 좀 더 고상한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

‘너도 한번 십자가에 죽어봐라!’

그렇게 해서 몸으로 ‘십자가 신앙(자아의 죽음)’을 체득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형제들을 굳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16:21에서, 십자가 신앙을, 지식적으로 가르치셨다면,

베드로의 배신을 통해, 십자가 신앙을, 체험적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말이 맞는 것이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2

 

예수님은, 더 멀리 베드로가 훌륭한 사도가 될 것을.. 미리 다 내다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한번 자아의 죽음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도록 묵인하신 거죠.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실패하는 것도, 예수님이 허락하신 의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세요.

 

그 실패를 통해서, 자기 자아를 죽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도록.. 섭리적으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쉽게 자기 자아가 죽지 않으니까,

절대로 자기 자아가 죽지 않으니까.

 

   애들이 난로에 아무리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해도, 가까이 갑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번 살짝 손을 데면,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난로에 가까이 가지 않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번 베드로가 철저히 자기 자아를 부인하게 되고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사건(실족)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렇게 한번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의 일을 하더라도

자기 실력으로, 자기 능력으로 달려갑니다. ←설교 제목 참조.

 

그리고 자기 의욕으로 왕성하게 주의 일을 하고

또 주변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막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번 이렇게 베드로처럼,

또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 벌써 한번 크게 넘어진 적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다 이렇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Nobody입니다.’ 라고

자기 자아가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보면

1. 열심히 주님을 따르다가.. 이렇게 깨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미지근한 중간층은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아주 열심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잘 깨어지고,

 

2. 그 다음에 아주 예수님을 안 따르고, 죄악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또 잘 깨져요.

아주 예수님을 안 따르고, 정말 무시무시한 죄악 가운데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 죄의 징계를 받아서, 완전히.. 좀 속된말로 박살이 나고

더 속된말로 하면 개박살이 나서.. 그렇게 죽게 되었을 때, 두 손들고 돌아옵니다.

 

이렇게 완전히 자기 자아가 한번 죽었다 살아나는, 그러한 체험을 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3. 그 중간층은.. 좀 무사 안일하게 사는데, 사실 영적으로 보면 제일 안 좋은 것이죠.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게.. 절대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없이, 수십년 계속 삽니다.

 

      1번 그룹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립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충성하고 헌신, 희생, 봉사 하고

      자기 재산을 다 드려서 주님을 따르다가.. 베드로가 그렇잖아요.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헌신, 충성, 희생, 봉사 했습니까.

 

이런 열심있는 사람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실제 경험’, ‘현장 학습’으로 잘 인도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섭리를, 공부하며 알고서 가면.. 그대로 좀 편할 것입니다.)

 

 

◑다윗의 십자가 경험

 

▲구약의 다윗도 그랬다고, 어느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를 하시더라고요.

다윗이 너무 열심히 충성하니까

다윗이 만약에 밧세바 사건으로 넘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대단히 교만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남을 쉽게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워낙 뜨겁고, 자기가 워낙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었으니까요.

 

‘아, 저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것 보니까, 눈 뜨고 못 봐주겠다.

제발 나처럼 좀 믿어라. 나를 봐라.

내가 얼마나 전쟁에 나가서 승승장구 하고, 백전백승했고,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모조리 하나님께 드렸지?

 

내가 하나님께 드린 재산이 얼만지 알아? 수천억이야 수천억.

너네는 얼마도 못 드리잖아.’ (적나라하게 돈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또 나는 시편도 잘 쓰거든?

내가 시를 지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줄 알아?

너희들과 나는, 급수가 다른 사람이야! 함부로 내게 맞먹으려 들지 마!’

 

다윗이 얼마든지 그렇게 영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교만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너무 하나님께 큰 은총을 받아서

너무 큰일을 많이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자기가 주위 사람들을 보니까

좀 이렇게 너무나 알로(아래로) 보이고, 시시하게 보이고,

좀 미덥지 않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교만함 가운데서 다윗이 과연 예수님을 낳을 수 있는 믿음의 조상이요,

구속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되기 힘들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실족하도록..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섭리적인 넘어짐’ 그러나 변명이나 합리화는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의 넘어짐도, 이 베드로의 넘어짐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진실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구속史의 한 기둥을 감당해야 될 굉장한 인물들이 되어야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쯤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여 버리시는 것이지요.

 

▲정리하면,

신앙고백 이후에 두 갈림길이 있는데

 

-하나는, 샤머니즘적인 신앙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좋다.

  이건 뭐 생각해볼 필요도 없고요.

 

-또 하나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주로 어떤 사람들이냐?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잘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의 길이란 것은, 지식이 필요하지만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뭐 운전도 그렇고, 수영도 그렇고, 자전거 타는 것도 그렇고..

지식으로 아무리 배워야 소용 없고, 실제로 자기 몸에 익혀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손, 발, 몸으로 익혀야.. 자전거도 탈 수 있고, 자동차 운전도 할 수 있고,

수영도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 배우지만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삶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강제적으로 그냥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데

가만히 보니까..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더 때리시는 겁니다.

(신앙생활 게을리 하다가, 얻어맞는/징계 받는 사람도 있지만요)

 

아주 예수를 잘 믿는데, 아주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주마가편,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이

더 잘 믿으라고, 더 온전하게 되라고 마5:48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지기 어려운 십자가를

억지로 이렇게 지게 해서,

억지로 자기 자아가 깨어지고,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경우를

신약에서 베드로, 구약에서 다윗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하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능력보다도 십자가가 우선이고

또 자기 어떤 경험보다 십자가가 우선이고

 

자기 자아가 완전히 다윗처럼, 또 베드로처럼

깨어진 그 가운데에서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어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신 것처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는 그러한 책망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신앙고백 이후에,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아니하면

사탄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며

십자가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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