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담 창조

진실탐구|2019. 6. 29. 20:39

http://m.blog.daum.net/cross114/5789747

 

두 사람 이야기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천지를 창조한 일과를 기록해 놓았다.

창세기 1장 속에는 천지만물이 창조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가 되고 난 후에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다.

 

칭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삼라만상이 모두 지어진 후에 나타나서 그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 손에 맡기시고 안식을 하신다.

이것이 제 칠 일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을 보게 되면 인간을 창조할 때의 모습이 창세기 1장의 모습과 전혀 다름을 보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의 창조 시점은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시고 난 후 맨 마지막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창세기 2장에서는 인간을 먼저 만드시고 난 후에 각종 짐승들을 만들었다고 증거 해 주고 있다.

 

우선 그 내용이 어떻게 다른 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 시점이다.

 

창 1:24-28=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럼 창세기 2장의 인간의 창조 시점을 보자.

 

창 2:4-8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8-2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1장과 2장의 내용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첫째로, 인간이 창조되는 시점이다.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 창조 시점은 이미 모든 천지만물이 창조된 이후이지만,

2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1장에서는 인간이 만들어질 때는 이미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채소와 씨 맺는 초목 등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2장에서 인간이 만들어지는 시점에는 짐승과 공중의 새나 들에 아직 초목이 없고 밭에는 채소가 없는 오직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 황량하고 메마른 상황에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이 만물을 모두 만들어 놓은 것을 다스리면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만물이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미완성된 상태이다.

 

둘째로 다른 점은, 인간을 창조한 재료(material)의 문제이다.

 

1장에서는 인간을 만들 때 그냥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2장에서는 흙과 하나님의 생기라는 재료가 등장한다.

 

아담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이름은 인간의 재료가 흙(아다마)이라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즉 아담이란 말은 흙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1장의 인간은 아담이라 불리지 않는다.

물론 1장에도 아담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그것은 사람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이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 아담의 의미와는 다르다.

 

1장에서 말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담은 이중적인 뜻을 갖고 있다.

 

첫째는, 보통 명사로서 일반 사람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유 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가리킨다.

 

창세기 1장에서 부르는 인간의 구체적인 이름은 남자(쟈칼)와 여자(네케바)이다.

 

1장과 2장에서 또 다른 한 가지 점은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인간의 창조는 남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에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빼어 여자를 만든 것이라고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창세기 2장의 기록이고,

1장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

1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기록도 없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1장과 2장의 모순점을 희석하기 위해서

1장은 개략적인 기사이고,

2장은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 정도의 내용이겠는가 묻지 아니할 수가 없다.

하여튼 1장에 나오는 인간은 2장에 나오는 흙으로 만들어 생기를 불어 넣은 정도가 아니라 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1장과 2장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살펴보자.

먼저 에덴동산의 존재 여부이다.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모로 보나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결과가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에덴동산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에덴동산이 창세기 1장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2장의 인간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어 경작하고 지켜야 하는 에덴동산이 1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단지 1장에서는 얘기할 기회가 없어서 못한 것을 2장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인간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는 선악과니 생명과니 하는 말들이 1장에선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냥 흘러 보낼 문제가 아니다.

 

넷째로, 하나님이 1장의 인간에게 주는 명령과 2장의 인간에게 주는 명령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1장의 인간에게는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고 하셨다.

 

그러나 2장은 어떠한가?

2장에서의 주된 관심사는 다분히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과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당부이다.

인간들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은 성경의 존재 근거와도 직결될 만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1장의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선악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1장의 인간에게 주신 말씀은 어느 모로 보나 행여 네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염려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그러나 2장에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엄청난 내용과 잘못하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쫓겨 날 수도 있다는 준엄하고도 강한 경고가 들어가 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을 하나님의 이름이다.

 

1장에서는 여호와라는 명칭이 빠진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창조의 주체로 등장하는 반면,

2장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명칭을 엘로힘으로만 표현한 1장을 “엘로히스트” 문헌이라 하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표현한 2장 이하는 “야휘스트” 문헌이라고 한다.

 

물론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창세기의 저자를 다수설로 보아서 해석을 하여 창세기 1장은 “엘로히스트”에 의하여 쓰여진 소위 “E문서” 계열이고,

창세기 2장 4절 이하는 “야휘스트”에 의해 쓰여진 “J문서”이기 때문에 서로 그 내용이 다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창세기 1장과 2장의 저자가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성령께서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을 믿을진대, 어찌 서로 모순되거나 상치되는 내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성령에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령이 창세기 1장과 2장을 기록 할 때 약간 실수를 하여서 이렇게 상호 모순되게 기록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왜? 창세기 1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은 곧 여호와이고, 여호와는 곧 하나님이지 무슨 새삼스런 얘기를 하느냐고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왜? 하나님이 1장에서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쳐 둔 채 엘로힘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나시고, 2장에 가서야 당신이 여호와라는 것을 나타내시는가 하는 점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어떤 숨겨진 의도는 없겠는가를 살피는 것이 성경을 읽는 신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나타나지만,

2장에서는 “야훼”로 나타난 것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읽고 해석 할 수 있는 열쇠이고 비밀이다.

 

주석가들은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고, 여호와는 구속주 하나님이라고 한다.

 

구속주라는 말은 잘못 된 것을 회복시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과 2장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장은 완벽한 것인데 2장은 뭔가 잘못되었음(타락)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 전체의 중심 사상이 예수님 이야기라고 한다면 왜? 창세기 2장 이후부터는 엘로힘 하나님은 슬쩍 자리를 피하고 야훼 하나님이 활동을 하시는지를 쉽게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일단 여호와 하나님이란 언약을 성취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만 살짝 짚어둔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 창조 기사에 대한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어찌하여 이렇게 서로 다른 기록이 동일한 성경의 앞뒤에 놓여 있을까 를 성경을 기록한 성령께 물어야 한다.

 

어째서 이렇게 기록해 두셨습니까? 라고,,,,

우리가 교회에서 유전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배운 대로라면,

1장과 2장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보충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예를 들면 1장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인간 창조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고, 2장의 기록은 그 구체적인 설명으로서 하나님의 생기는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며, 남자를 먼저 만들고 나중에 여자를 만든 것도 1장의 보완 설명이지 모순은 아니라고 배웠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고 주신 명령도 1장의 명령에 더하여 2장의 명령이 추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1장에서 에덴동산이 나오지 않는 점도 2장과 모순이라기보다는 1장에서는 땅이라는 말 가운데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을 2장에서 에덴동산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거론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인간의 창조 시점을 둘러싼 문제에 있어서 그 상호 보완성의 의미가 빛을 잃는다는 점이다.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 창조는 천지창조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이지만,

2장에서의 그것은 어떤 면에서 천지창조를 시작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인간이 들의 초목이나 채소보다 먼저 등장한다.

인간이 들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보다 먼저 등장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양보하고 보더라도 1장의 사건과 상호보완성을 띤 설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면 어떻게 볼 것인가.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를 보충하는 설명이 아니라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사람의 창조로 보아야 한다.

즉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인간과 2장에서 만들어진 인간은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가정이다.

 

이럴 가능성은 없는가?

우리는 너무 직선적이고 단선적인 사고로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다.

무슨 글이든 서론이나 총론에서 언급된 내용이 반드시 먼저 일어난 사건일 수는 없듯이 성경도 그렇다.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의 축약이며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쉬운 예로 이해한다면 어떤 책을 펴면 첫 장에 머리말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책 전체 내용의 목차를 맨 앞장에다 적어 놓는다.

 

머리말을 통하여서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여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는 목차를 통하여서 이 책의 내용은 1페이지에 20페이지까지는 무슨 내용이고, 21페이지부터 50 페이지까지는 무슨 내용이라는 식으로 안내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은 머리말과 같이 앞으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해 나갈 것이라는 뜻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성경의 이야기는 창세기 2장에서부터 시작에 되어지는 것이 된다.

즉 “엘로힘(성부)” 하나님이 “야훼(성자)” 하나님을 통하여서 어떻게 일을 해 나가실 것인가를 서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되는 사건은 지금 당장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도 장차 일어날 사건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즉 1장의 내용은 성경 전체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일어날 일일 수도 있고, 따라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면서도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속에 들어있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창세기 1장을 보면 이미 하나님은 그의 계획했던 천지창조를 모두 이루시고 제 칠 일에 편히 안식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창 2:1-2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러나 천지창조가 다 이루어지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오신 예수님은 창세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아버지가 안식하시지 않고 지금도 일을 하시고 있다고 하신다.

 

요 5:17절에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 상식으로는 창세기의 증거를 빌리면 하나님은 분명히 안식을 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아버지가 아직까지도 일을 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가 일하신다는 말은 천지창조의 일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창세기에서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실 때의 일은 천지를 창조하는 일이 맞지만,

요한복음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의 일은 인간을 구속하시는 일이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들이 죄 가운데 헤매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천지창조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소위 인간의 타락까지도 미리 알고 계셨다고 보아야 한다.

진정한 천지창조의 완성은 타락한 인간을 다시금 당신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시는 것까지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다.

 

엡 1:4-7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창세전 언약은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순서를 보면 타락이 먼저이고 구원이 나중이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이란 것도 충분히 예견된 일 가운데 있는 사건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을 마치면서 기록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표현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과 그 이후의 영생의 문제까지를 모두 다 이루신 다음의 안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들의 죄를 구속하는 일을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이러한 천지창조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즉 아버지를 안식하시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아직도 쉬지 못하고 일하시는 상황에서(즉 제 칠일 안식일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아들이 홀로 쉴 수 있겠는가 하는 지적이 요한복음의 말씀인 셈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5장 17절의 시점은 당연히 창세기 1장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시점이고 이런 일련의 작업이 완성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제 칠 일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쉬셔야 하는 제 칠 일 안식일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감당하셔야 할 몫인 셈이다.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안식하실 수 있도록 엿새 동안에 죄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는 모두 창세기 1장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된다.

이 모두가 엿새 안에 이루어질 일들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나타난 것이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로 나타난 것이 이해가 되어 진다.

그래서 성경은 엘로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이름으로 나타났고,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을 실체적으로 이루어가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엘로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다.

그래서 창세기 2장부터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구속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이다.

즉 창세기 2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이 전체의 축약이요 설계도의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면,

1장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당연히 성경 전체 속에 그 구체적인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고,

거꾸로 신약 성경에 나오는 어떤 내용들은 창세기 1장에 그 기본적인 개념이 씨눈의 형태로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는 창세기 1, 2장이 서로 동일한 인간에 대한 상호보완적인 묘사라는 기존의 시각을 벗어나서, 서로 다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려고 하는데,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러한 견해에 순행하는지 역행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성경 전체를 두 종류의 사람 이야기로 놓고 흐름을 짚어가 보면 우리는 성경이 아주 놀라우리 만치 상반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져 간다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가 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서 난 자”와 “흙에서 난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전 15:44-49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다.

 

요 8: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3:6-7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위로부터)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사도 바울은 아담(사람)을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육 있는 자(푸쉬키코스, 혼적인 사람)와,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영적인 사람)!

흙에서 나서 땅에 속한 사람과 말씀으로 나서 하늘에 속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육과 영 두 종류의 사람을 보자.

 

가인과 아벨을 비롯하여,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다른 형제들과 요셉 ,

하갈과 사라,

레아와 라헬,

브닌나와 한나,

사울과 다윗,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들의 표상들이다.

한 쪽은 하늘(천국)로 나서 하늘로 간 자들의 모습이고,

다른 한 쪽은 흙(지옥)으로 돌아간 자들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항상 육에 속한 자들이 먼저이고 영에 속한 자들이 나중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하늘에서 난 사람과 땅에서 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창세기 2장의 사람은 하늘에서 난 사람인가?

아니면 땅에서 난 사람인가?

우리는 흔히 창세기 2장의 인간이 하늘에서 나기는 했지만 타락하여 흙에 속한 인간이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지적하는 대로

창세기 2장의 인간은 나면서부터 흙에 속한 인간이며, 영생하는(프뉴마티콘) 존재가 아니라,

육적인(푸쉬키콘) 존재라는 점이다.

흙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로 변화시키는 일을 살려 주는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신다고 한다.

 

즉 창세기 2장의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듯이 흙에서 난 인간들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함에도 선악과를 먹고 죽음의 길로 걸어갔다는 것이다.

아담의 착각은 자신이 완전한 자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이런 아담의 모습은 지금도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이 생명인줄 알고 살아간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모른다.

사람들은 예수라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여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오히려 세상이 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흙에 속한 선악과를 먹고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에겐 흙이 그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점이고,

1장의 인간에 재료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1장의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2장의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인 것이다.

사도 바울의 지적대로라면 창세기 2장의 사람은 흙에 속한 첫 사람이고,

1장의 사람은 생명과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거듭난 하늘에 속한 마지막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사람이 창조되는 시점이 서로 달랐던 점을 이해할 수가 있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이 반드시 생명과를 통하여서 한 번의 변화를 거쳐서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창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신약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하나님은 애초부터 모든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사람으로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작정해 놓으셨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골 1:16-17절에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결국 창세기 2장의 흙으로 지음 받은 아담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늘에 형상을 덧입게 되는 순서를 밟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 흙에 속한 아담이 어떻게 하늘에 속한 아담으로 살아나는지 알아보자.

 

예수님께서는 요 5장 25-29절에서 말씀해 주셨다.

 

요 5장 25-29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란? 흙으로 난 아담을 말하는데 이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늘에 아담으로 살아난다고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찾아가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여 흙으로 난 아담을 하늘로 난 아담으로 살려내신 것과 같다.

 

예수님은 지금도 흙으로 난 아담을 찾아가서 하늘에 아담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시고 계신다.

아버지가 안식을 하실 수 있도록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신다.

  “엿새가 차기까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창조사역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창조를 하시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게 된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는 우주의 중심이며 역사의 중심이며 인간들의 삶에 중심에 서 계신 분이다.

 

예수만이 생명이고!

예수만이 길이고!

예수만이 진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셨고,

내가 곧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만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만이 참 생명이라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다 죽은 자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중심 주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중심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서 있어야 한다.

타락한 아담을 하늘에 형상을 덧입게 하는 중심엔 십자가가 서 있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에게는 예수의 십자가는 삶에 의미이고 전부이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아는 자는 모든 것을 아는 자이고,

예수의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모든 것을 모르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얻은 자는 모든 것을 얻은 자이고, 예수를 놓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창세기 2장 이하의 인간들 이야기는 이러한 흙에 속한 첫 아담이 어떻게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며, 혹은 어떻게 땅에서 유리방황하는가에 대한 인생유전들이다.   

어떤 아담은 가인처럼 영원히 땅에서 유리방황하는 이들도 있고,

또 어떤 아담은 아벨처럼 육신은 죽었으나 영원한 하늘의 사람이 되는 영혼들도 있다.

 

히브리서 11장이 증거하는 아담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하늘을 향하여 살아간 자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다.

 

히 11:8-16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입으려고)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신앙생활이라 함은 흙에 속한 자가 더 이상 흙의 필요에 연연하지 않고 흙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가는 것이다.

아담의 생명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흙이 전부가 아니라 잠시 거쳐 가는 세상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엿새가 차기까지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하는 날을 기다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미 안식에 들어갔고,

어떤 이들은 안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엿새가 차기까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