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한) 말씀으로 기도하기 1강 / 돈 휘트니

묵상/Word-God|2019. 5. 25. 09:57

 

이것은 세계 공통적 경험으로 여겨지는데

크리스천들이 기도할 때 얼마 지나지 않으면

틀에 박혀 지친다는 것입니다.

했던 기도를 또 하고, 했던 기도를 또 하는 셈이 되죠.

 

당신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건 지루한 일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가 지루해진다면

그건 기도하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죠.

 

그래서 기도를 지속적으로 열정적으로 계속 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2등급 크리스천처럼 느낍니다.

기도 잘 못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제 주장인데, 그건 간단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초청할 때는,

온 세계의, 모든 연령의, 모든 교육 수준을 다 포함해서

모두가 기도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인데요,

그래 간단해야 합니다.

 

그 해결책은 ‘(기도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하죠.

그래서 간단하고 영구적인 성경적인 해결책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성경구절을 통해서 기도하십시오!> *주제

 

제가 예를 들어 볼게요.

다같이 시편23편을 보시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성경으로 기도하는 건지 한 번 시범을 보여 드릴게요.

 

제가 성경을 읽은 후에

23편으로 갑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제가 1절을 읽고는 기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하죠.

주님,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주님은 제 일생을 목자로서 돌봐 주셨습니다.

 

오 위대한 목자님!

당신이 제 미래의 어떤 결정에 대해 목자처럼 인도해 주시겠어요?

제가 직장을 바꾸어야 할까요, 안 바꾸어야 할까요?

주님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가정을 목자로서 돌봐주소서.

우리 식구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소서.

세상 방식에서 우리 식구들을 (목자로서) 보호하여 주소서.

 

시험에 빠지지 않게 인도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주님 기도합니다. 당신이 제 자녀들을, 손주들을 당신의 양떼가 되게 하소서!’

 

자녀손주들이 제가 하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자기들의 목자로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교회도 목자의 돌봄 아래 있게 하소서,

그들이 성도를 치듯이 그들도 주님의 침(돌봄)을 받게 하소서!

 

그래서 첫 줄에서 더 이상 기도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성경 두 번째 줄로 갑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만약 제가 오늘 그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기도하겠어요.

주님, 제 모든 필요를 당신 안에서 채워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제가 알기로 제 소원을 주님께 아뢰면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 주님, 우리가 자동차, 학비 등의 청구서들을 지불할 수 있도록 우리 재정을 도우소서.’

 

혹은 아마 제 생각에 어떤 사람은

뭔가 부족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의 필요를 위해서도 기도해 줍니다.

 

그리고 제가 더 이상 기도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23편의 다음 구절로 옮겨갑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이 구절에서 제 마음에 떠오르는 바를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 주님, 저를 이런 곳에 눕게 하시고 낮잠 좀 자게 해 주세요!’

 

아마도 푸른 풀밭하면 여러분의 생각에

하나님의 양떼들이 푸른 풀밭에서 말씀을 먹는 장면이 떠오르실 겁니다.

당신의 말씀 사역,

또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

그러면 당신은 그 성경교사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죠.

 

당신이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기도한 적이 언제였습니까?

 

성경말씀이 그 성경교사를 위해 기도하도록 유발합니다.

당신이 푸른 풀밭 구절을 볼 때요.

 

그리고 다른 기도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계속 나아갑니다.

그가 나를 잔잔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주여, 제 미래에 관한 이 결정에 저를 인도하여 주소서!

주님,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게 제게는 아직 모호합니다.

당신은 제가 어떻게 하기 원하십니까? 저를 인도하소서!’

저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소서!

제 심령에 물이 동요하고 있는데 잔잔케 해 주소서

아마도 우리 집에 물이 출렁인다면 잔잔케 해 주소서

직장에서의 물을 잔잔케 해 주소서

다른 어떤 곳이든지 물이 요동하는 곳을 잔잔케 해 주소서

 

그래서 제 생각에 떠오르는 기도를 다 드린 후에 다음 줄을 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주여, 제발 저를 소생시켜주소서!’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죠 당신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51:12

저는 솔직히 오늘 영적으로 매우 메마른 채 당신께 왔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로만 오는 은총을 제게 회복시키소서!’

 

혹은 여러분의 직장이나 가정에 안 믿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 전하고 싶은 그 사람,

여러분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 그의 심령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시켜주소서

 

이렇게 계속 성경구절을 읽어내려가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시간이 끝날 때까지, 혹은 그 시편이 끝날 때까지

그러면 또 다음 장을 넘겨서 기도하면 돼죠.

 

제가 지금 여러분께 도전드립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집으시고, 지금 5~7분 동안 시23편으로 기도해 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성경으로 기도하는지 더 배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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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가 감사하게 느껴질 때 / 스크랩

묵상/Word-God|2019. 5. 11. 16:22

 

◑거룩함에 참예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하나님이 과연 복을 주시느냐?

일이 잘되게 해 주시느냐?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게 막아주시느냐?’ 에 둡니다.

 

그러면 믿음은 종잡기 어려울 정도로 요동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금방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지만

어려움을 겪고 실패를 하고 징계를 당하는 일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성공, 축복이 아닙니다. 거룩함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서도 징계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히12:1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은,

단순히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천국가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온 것만도 아버지에게는 큰 기쁨이지만, 아버지의 더 큰 기쁨은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아들답게 반듯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돌아온 탕자라는 것에 머물면 안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점점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십니까?

작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까? 3년 전, 5년 전과 몰라보게 달라졌습니까?

 

만약 자신이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면,

죄 안 짓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여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12: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심을 믿는다면,

돈 벌고 성공하기 위하여 살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을 왜 목표로 삼습니까?

죽기 살기로 죄와 싸우며, 거룩하기 위하여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능한 자로 평가받을까봐 안절부절합니다.

세상에서는 무능한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무능하면 징계를 받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죄를 지어도 유능하면 받아줍니다.

정치인도 기업인도 군인도 유능하고 사회에 공헌한 것이 크면

어느 정도 면죄부를 받습니다. 적당히 죄를 지어야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무능한 것을 징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무능한 자를 일부러 택하여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전1:27~2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못한 것, 죄에 대하여 징계하십니다.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능하여도 바로 징계하십니다.

 

▲다윗이 자신의 충복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아주 야비한 방법으로 머리를 써서 그 부하를 죽입니다.

 

당시 왕권 사회에서 왕이 부하의 아내 하나 취한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처절한 매를 가하십니다.

밧세바에게서 낳은 첫 번째 아들을 낳자마자 죽습니다.

그렇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잘 생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습니다.

압살롬은 궁중에 있던 아버지의 처첩들을 백주 대낮에 옥상에서 범합니다.

비참할 정도의 매를 다윗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기에 더욱 무섭게 치셨습니다.

다윗이 세상 왕처럼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럴 가능성 자체를 막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하고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높아지고 부자되고 성공하면 매 맞을 확률이 더 큽니다.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징계하십니다.

 

한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처럼 귀하게 쓰임 받던 분들이

은밀히 죄를 짓다가 죄가 드러나, 하루 아침에 고꾸라진 것을 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주님이 그 종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하셨구나!’ 깨달아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비참하지만 그들에겐 잘 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여기서 회개할 기회를 얻었으니 말입니다.

 

징계를 받지 않은 사람, 은근히 다행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야 비로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면

차라리 그 실족한 종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돈 잃고, 건강 잃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사실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였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시는 이유는

거룩하지 못하고, 죄짓고 살면 구원의 복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죄짓는 것은 자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누가 이 예배당에 들어와서

강단 위에서 술판을 벌리고, 담배 연기로 가득하게 하고, 음란한 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멱살잡이를 하고 싸우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저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크게 벌을 받으려고 저렇게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이 예배당이 아니라 우리 몸입니다.

그런데 술 취하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음란한 짓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은, 마귀로부터 끊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깨우칠 수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못 알아들으니 어떻게 합니까?

 

다윗도 못 알아들으니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셨습니다.

발람선지자도 알아듣지 못하니, 자기가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통하여

책망 받는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 그런 사람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마귀가 무조건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흥미 있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는 자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는 분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하고 싶은 것은 못하게 하고 안된다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 하고 그러다가 툭하면 징계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무섭습니다. 마귀는 친구입니다.

 

이런 사람은 징계가 필요합니다.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죄는 재미있고, 거룩함은 재미없는 삶이라고 속삭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입니다. 완전히 세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죄짓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달아야 벗어나려 하게 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19금 영화를 보고 회개한 것에 대하여 페이스북에 썼을 때,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너무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는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죄, 죄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된 성인물로 인하여

지금 어떤 결과가 빚어지고 있습니까?

 

엄청난 음란물 홍수에서,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음란물에 빠져,

상상도 안되는 성범죄에 고통당하고, 가정이 파탄되고 있습니다.

 

제가 24 시간 예수님만 바라보면 사는 데, 변화가 있습니다.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목회에도 그렇습니다.

 

“우울증 아니냐?”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제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을 보면.. 우울증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 때 무엇 보다 감사한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11절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평화는 전쟁이나 무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5절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통하여 죄를 끊어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실 때,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인지 확신할 수 있나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 모르니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한 사람 회개케 하기 위하여, 지중해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그 때 요나는 깨달았습니다. ‘나 때문이구나!’

그래서 “바로 나 때문이요!” 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도 살고, 선원들도 다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말 확실히, (징계를 통해) 깨닫게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얼마나 두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징계를 받기전에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또 조심할 것은, 징계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12:5절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본문은 낙심에 대하여 길게 다릅니다.

 

낙심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돈을 가져가고, 건강을 치시고, 시련을 주실 때,

돈 잃은 것, 건강 잃은 것 시련이 닥치는 것만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죄를 끊어 버리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징계는 끝납니다.

깨달았는데 왜 징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징계는, 사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징계가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징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내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아파서 죽어가는 아들을 징계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징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사생자가 아니고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6절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

 

7절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8절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당할 때, 오히려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12-13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제 삶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경험은, 군목 훈련 부상이었습니다.

이유를 몰랐습니다. 단순한 사고였고 운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그리 방탕하지도 않았고 큰 죄지은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제 죄가 깨달아졌습니다.

 

목사면서도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육신의 아버지만 못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아지는 것은 더 비참하였습니다.

제 소원은 이왕 목사가 되었으니 유명한 목사 성공한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큰 교회를 담임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내면의 온갖 죄가 다 드러났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모범생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지옥에 갈 죄인임을 비로서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그 때, 다리 부러진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리 부러진 것을 감사했습니다. 다리를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장애인이 되어 거룩하게 사는 것이,

두 다리 멀쩡하여 제 성공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진짜 종이 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의 목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루 밤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 때부터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일할 교회도 없었고, 훈련소만 3년 해마다 들어갔고

그러나 마음이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군목시절, 부임한 부대 연대장은 제게

“목사님께서 낙심하고, 포기하실까봐 가장 염려됩니다.”

그동안 부대 여건 때문에 낙심한 목사님을 많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부끄럽지만 군단장 표창도 받았습니다.

광주통합병원에서 밤새 울던 일을 생각하면 어디가나 감사한 것뿐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거룩한 삶을 삶의 목표로 삼아 보셨습니까?

그런 적이 없었다면 이제 결단해 보십시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징계 받지 않고도 깨달았다면 왜 징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서워할 것은 징계가 아니라 죄입니다.

그러면 징계가 없습니다. 징계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혼자하면 안됩니다. 거룩한 손을 서로 잡고 연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거룩한 공동체를 만듭시다.

 

전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잘되는 것, 복 받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얽매인 죄를 벗어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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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사명입니다 / 십자가 설교 시리즈, 스크랩

묵상/Word-God|2019. 5. 11. 16:20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 마디로 말하면 고난입니다.

물론 그 십자가의 고난을.. 고통스럽게만 여기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 끓어넘쳐서.. 기꺼이 그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사명자에게 있어서,

십자가, 그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몸’에 대한 사랑이 끓어 넘쳐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면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 속에서 고난이라는 현실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고난이 없다’ 라고

이렇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경을 일면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에게도.. 반드시 고난을 주시고,

심지어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일반 신자에게도.. 고난을 주시는데요..

이래 저래 성도는.. 고난을, 그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원치도 않는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고난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구원을 이루는 고난

 

고린도후서 4장 17절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한 것이,    *가벼울 경輕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무거울 중重

 

우리가 지금 받는 환난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 환난의 가벼운 것을 통과한 사람만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한 것, 우리가 받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도 않는 ‘고난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성도에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어주셔서,

우리를 ‘구원의 완성, 성숙,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2. 또 복음 전파자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예수님을 잘 믿어서 고난이 없다.’

그런 말도 30% 맞지만 70% 틀린 말입니다. 왜 그에게 고난이 없는가요?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남들처럼 큰 고난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이 아니거나, 그를 구원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자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고난이 없지요.

 

로마서 1장에도 사람들이 욕심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말씀이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런 사람은 고난이 없을 수 있습니다. (없지는 않고, 고난이 적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그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밝은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가운데서 하늘로서 이런 음성을 들었는데

‘그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여주었노라’ 행9:16

 

이것은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만약 바울에게만 적용된다면, 꼭 성경에, 이 구절을 명시할 필요가 없었겠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은, 바울처럼, 많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복음 전파는.. 반드시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군’이 아니라요.

 

그게 성경적 방식이고,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무력과 힘을 앞세운 복음전파는.. 사실은 복음전파가 아니지요.

예수님이 먼저 그러하셨듯이

그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하지만,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경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지 않는 삶’은, 현재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아서, 사업도 잘 되고, 자녀도 잘 된다고 말하지만

그런 면이 30%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잘 믿고 복음 전파 사업에, 해외 선교 사업에 투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과 같이 ‘얼마나 많은 고난의 길을, 피하지 못하고, 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고난이고, 고난은 사명’입니다.

지금 이 메시지의 제목이 ‘고난도 사명이다’ 인데요,

 

‘사명 Commission’이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답게 들립니까?

장밋빛 같아 보이고, 새파랗고 청명한 하늘처럼 아주 멋있고 고상하게 들리는 말이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 그 아름답고 고상하게 보이는 그 단어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속 본질은.. ‘사명은 곧 고난’인 것입니다.

 

딤후1:8절에도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야, 네가 가게 될 복음 전파의 그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 ..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마10:16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불과 15년 전에 한국의 어떤 선교사가, 터키에서 선교사임이 발각되어서

일정 기간 감옥에 갇혀서, 또 폭행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그 선교사가 풀려나서, 한국에 돌아와서 간증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감옥에서 구타를 당한 그러한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혹시 그분께 정신적 충격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지요.

 

여기는 해외 선교지가 아니라서,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뭐 그래도 복음을 전하는 중에, 생활비가 떨어져서

바울처럼 굶고 춥고 헐벗는 일을 당하는 이런 ‘생활고의 고난’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저는 어느 날, 위 구절을 눈을 씻고, 몇 번이나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성경을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 같이 복음전파에 충성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여태껏 들었던 기복주의적 설교에 의하면,

복을 받아도, 정말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히 받아야 할 터인데..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바울이 ‘굶고, 춥고, 헐벗었다니요?’

(그래서는 안 되지만) 정말 따지고 싶습니다. ‘저기, 실례지만.. 좋으신 하나님 맞나요?’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없으면,

우리 일반 신자나, 사역자의 삶에.. 많은 딜레마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너무나 기복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뻔한 현실(고난)을 보고서도.. 납득이 되지 않고, 시험에 들고, 신앙성장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성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3. 신자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집니다.

(위 ▶1번의 연장선상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엄마나 아빠들은 자녀를 키울 적에,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면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래서 흔히 ‘딸 바보’도 있고, 뭐 ‘아들 바보’도 있지요.

 

어린 자녀들이, 다가와서 엄마 아빠 품에 편히 안기는 것은,

부모들로서는 정말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지요.

‘하나님께서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 품에 안기면,

정말 매우 기뻐하시겠구나.’

 

그런데 이제 자녀들이 조금만 크면, 부모에게도 잘 다가오지 않듯이

성도들도 조금 지나면,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잘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때때로 우리가 너무 멀리 벗어나 있을 적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다가오게 하십니다.

 

병에 걸리기도 하시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도 하시고,

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게 하셔서

정말 이 성도가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도, 57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천국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에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오래 살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빨리 소천하신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그 분은, 평소에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편안한 때, 젊었을 때, 받았던 모든 은혜는 거의 헛되거나 아주 작았다.

그러나 내가 고통 받고 괴로웠을 때 받았던 그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웠다.’

 

‘스펄전 목사님 같은 신실한 분께, 무슨 고통이 있었을까?’ ..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목사님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편안하고 즐거웠을 때 받았던 은혜는, 작거나 헛된 것이었고

고통당하고 괴로운 시간에 받았던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길을,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수년간 고생한 코리텐 붐 여사는, 후에

그 수용소 시절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 했습니다.

 

‘내가 붙잡고 의지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을 때

그제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음을!’

 

코리 여사는, 평소에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까지 가깝지는 않았는데

정말 그 수용소에 들어가서, 그 어려운 가운데서

 

예수님이 정말 자기와 함께 하시고, 내주하시고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그러한 가운데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성도가 고난을 당할 적에 불신자에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24:14절에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된 후에 그제야 주님이 오신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증거(마르투리온) 라는 말은,

행1:8절에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와 같은 말입니다. *마르투스

 

이 말의 뜻은, 그냥 뉴스 전하듯이, 어떤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자기 삶의 증거로.. 그 사실이 확실한 것임을.. 몸으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즉, 성도가 ‘증거’(마24;14)를 하거나 ‘증인’(행1:8)의 삶을 사는 것은

(위 두 구절 말고도, 신약성경에 몇 구절이 더 나옵니다.)

-말로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증거로서, 자기 생활로서 증인의 삶을 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세상에서, 자기 신앙 지킴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지만,

꿋꿋이 참고 이겨나가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는 것이에요. 전도가 되는 것이에요.

 

일례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고난을 당했지만

밤중에 그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했을 적에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어요. 행16:25

 

일반 수인들은 감옥에 갇혀서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

성도인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증인’이 되고, 그 삶이 ‘증거’가 되어서

실제로 빌립보 감옥에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불신자들은 그것을 못 본 척, 안본 척 하면서도

자기들의 마음이 요동 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 저것이 기독교 신앙이구나!’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미리 하셨습니다.

마10:18절 ‘또 너희가 나로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전도의 기회, 증거의 기회’가 될 것임을,

예수님이 미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너희가 그런 일을 당할 적에.. 당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불의한 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적에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여 주셨는가?’ 하고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100 배 복은 고사하고, 30배만 주셔도 좋겠는데

30배의 복은 커녕, 오히려 어려움과 환난을 당하게 하실 적에는

그 일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행1:8절이 이루어지고, 마24:14절이 이루어지는 기회인 것이에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된 후에, 예수님이 오시고

너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증인, 증거가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잡히고, 고생하고, 괴로움과 핍박을 당하고..

이러할 적에

세상 사람들에게, 임금들과 왕에게.. 복음이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희한한 복음전파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마10:18절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가이사랴 로마 군대안 감옥에서 2년,

후에 로마로 이송되어, 로마 가택연금 2년,

그런 식으로 <증거, 증인>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그래서 고난이 곧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곧 신자의 ‘사명’이고,

‘사명’이 뭐냐?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 = ‘사명’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복주의 신앙에 지난 50년간 물들어서

직분자가 되는 것은, 50년 전에는, ‘고난의 길을 가는 길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요즘에는 다 ‘축복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 안수, 장로 장립, 권사 임직을 할 적에,

‘이제는 장로님 되시고 권사님 되시면,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덕담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그렇게 직분을 맡음으로써

‘더욱 더 증인의 삶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증인의 삶은 무엇인가 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는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요, 직분자/사역자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바울의 고난을 통해서, 많은 주변 동역자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빌1:14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박을 당했는데

그의 결박을 통해서 다른 많은 형제들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자기가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해서 갇혀있는 그것이

다른 많은 형제들에게,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흔히 전쟁터를 다룬 영화를 보면

다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면, 겁을 잔뜩 먹고 있는데

동료 한 병사가 부상을 당하거나 죽으면

다른 병사들이 열 받아서, 갑자기 총탄이 쏟아지는 적진을 향해 돌진하게 되지요.

 

      성도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많은 다른 성도에게 자극이 되고,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 왔다가

선교도 제대로 못 해보고, 얼마 못가서 질병에 걸려서 순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에 감동을 받아서

호주에서 선교사들이 순차적으로 한국으로 건너 왔는데

다 합하면 80명에서 120명이나 되는 그러한 수 십 명의 다른 호주 선교사들이

데이비스 선교사의 질병으로 인한 순교에 열을 받아서

한국에 와서, 부산 경남 지역에, 놀라운 선교의 열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도 1997년에, 아프간에서 배형규, 심성민 선교사의 순교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크게 한 번 각성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5. 천국에서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가라지는..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떨어져 나가지만

알곡 성도는..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는 ‘비교’입니다.

현재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비교를 해 보면,

우리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차 영광’.. 둘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물건을 사기 전에, 늘 비교를 해봅니다.

내가 가진 돈 만원의 그 가치하고

저 물건의 가치하고 비교를 해서

만원을 줘도 괜찮겠다 싶으면.. 사는 것이지요.

 

나는 만원을 냈는데, 저 물건의 가치가,

눈짐작으로 보았을 때 오천 원 밖에 안 된다.. 그러면 그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지금 고난당하는 이 고난의 총량, 가치가 얼마인가?’,

그리고 ‘장차 내가 천국에 가서 받을 그러한 영광이 얼마인가?’

이것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 로마서 8:18절입니다.

 

그렇게 비교할 적에는 우리는 능히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훨씬 이익 보는 거래이니까요.

 

이런 말씀을 유념하셔서, 베드로서에 나온 것처럼

‘너희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적에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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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사역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 / 데이빗 윌커슨

묵상/Word-God|2019. 5. 9. 08:46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으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모두)가 이 직분(ministry)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4:1).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직의 개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직이란 목사안수를 받은 설교자나 선교사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목사들이란 신학교를 졸업한 후 결혼식과 장례식 사회를 보고,

예배를 인도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목사를 아픈 자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영적의사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식대로 성직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사역의 성공 여부를 그 규모나 효과 면에서 평가하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성취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사역이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교회가 얼마나 커졌는지,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했는지가 아닙니다.

 

물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행해 왔습니다.

은사가 넘치는 남종과 여종들이 거대한 예배당을 건립하고,

기독교 기관과 학교를 세우고, 복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똑 같이 넘치는 은사를 가지고도 어떤 이들은 사심을 가지고 사역을 합니다.

간음한 자, 음란한 자, 술 취한 자, 동성애자 등 모두가

자신들의 은사와 명철을 이용해서 교회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 왔습니다.

 

저는 경건한 업적을 통해서 사역을 세우고 발전시킨 의로운 목사들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은 우리를 상처받고

곤궁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을 무엇인가를 하는 것,

업적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이 되는 것,

어떠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르심을 받은 어떤 직분, 사역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이 사역은 어떤 특별한 은사나 달란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직분은 거듭난 사람이면 목사이든지 평신도이든지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역은 모든 성도들의 첫째가는 소명입니다.

다른 모든 수고와 노력은 이 소명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어떤 사역도 이 소명으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사역이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라고 말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3:18).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여기서 온 마음을 바친, 헌신된,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만 드려진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말을 잇습니다.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고린도후서 4:1)

 

바울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우리 모두가 헌신해야 하는 사역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본다"는 뜻의 희랍어 단어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냥 한 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어. 나의 한 가지 목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달성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어"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3:18)는 구절을

오해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반사되어 비춰지는 거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보다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마치 거울을 뚫고 볼 정도로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응시하는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결심하고

우리의 눈을 이처럼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집념, 우리가 변화받기 위해 골똘히 응시하는 것,

헌신된 맘으로 교통하는 것을 가지고 지성소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만 집중하고 
그를 보는 자는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바울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 기록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3:18).

 

여기서 "변한다"는 뜻의 "화하여"라는 단어의 희랍어 원어는 변형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변화, 변형, 변신을 의미합니다.

 

지성소에 들어가 그 시선을 그리스도께 열정적으로 고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변화를 받습니다. 환골탈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갑니다.

 

여러분 중에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자주 나아가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과만 보내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느끼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화를 받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말 중 마지막 구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후반).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역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앞의 구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바를 아시겠습니까?

그는 우리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 변화의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므로 우리는 성령께 우리의 삶을 통치하도록,

성령의 의사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자유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제 의지는 주님의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저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십시오

라는 복종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볼 때 가장 먼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지,

얼마나 우리의 육으로 무엇인가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자연스러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이루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

결코 어떤 수고를 하거나 땀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는 변화 받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변화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과정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약속에 의해, 성령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저 주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

우리의 눈을 그분께 고정하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창조자요 완성자이신 주님께 모든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영을 통해서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공언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치하고 계시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시험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 여러분 안에서 점점 증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완전히 통치하고 계시다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불쑥 늘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물러나거나 후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끊임없는 변화가 점점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증가는 단지 울부짖을 때나

시험의 때에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는 변화는 영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에는 정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주로 우리의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고 기록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연약한 그릇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담아 드러낼 수 있을까?

특별히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말이야?’ 라고 의문을 가지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실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기로 정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고난과 시험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의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웬과 제가 저희 손녀딸 티파니의 뇌암 발병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는 저희 딸 데비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데비가 어떻게 이 일을 견딜까? 그 애는 너무 연약한데라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데비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바위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 안에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데비는 어디서 그런 힘을 발견했을까요?

여러 달 동안 그녀는 귀용 부인 Madame Guyon

아미 카르마이클 Amy Carmichael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데비는 그들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예수님을 더욱 알기 원해요.

 

그녀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만 여러 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으로까지 넘치도록 비춰지는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녀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 모두는 데비의 남편 로저에게서도 똑 같은 힘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시험을 당하는 내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 신뢰와 안식은

그들이 행한 강력한 사역이었습니다

 

저는 대담한 주장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고난
시험은 사역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성직에 앉힐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교단에서 안수를 받을 수도 있고 총회에서 어떤 임무를 부여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한 성직으로의 부르심의 유일한 원천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디모데전서 1:12).

 

예수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기셔서 능하게 하셨다는 바울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의 회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회심 3일 후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고난의 사역이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사도행전 9:16).

 

바울이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라"(고린도후서 4:1)고 말했을 때

그가 언급한 직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긍휼하심을 받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1).

 

그는 고난당하는 사역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 모두가 이 직분을 맡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이 사역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언제나 신실하실 것을 맹세하셨고

그가 겪는 모든 시험가운데 능력을 주실 것을 맹세해주셨던 것입니다.

 

"능력을 준다" 희랍어 원어는 지속적인 힘의 공급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내게 이 여정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힘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로 이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언제나 신실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저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도리어 간증할 것들을 가지고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에서

일차적인 소명으로 여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설득력 있는 설교였습니까?

깊은 가르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인정했듯이 바울은 달변의 웅변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조차 바울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베드로후서 3:15-16).

 

그러나 이때쯤 바울은

이미 그의 모든 세상적인 지혜와 세상에서 배운 지식들을 내던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설교나, 병낫게 함이나,

인간적인 총명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 자기 안에 만들어진

그리스도를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험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했는지 그 모습으로 인해 자기 시대 뿐 아니라

우리의 세대에까지 여전히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말이 의도한 바는 "여러분은 앞에 한 인간이 서있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커다란 시험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제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제게서 보는 광채입니다.

 

오직 신실하신 능력자만이 인간의 삶에 이것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기의 종들에게 모든 시험 가운데서도 찬양과 간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8-10).

 

바울은 초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생존하리라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린도후서 1:8-10).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십니까?

그는 우리에게 "우리는 인간적인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억눌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겪은 가장 큰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사망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소명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보고 있어. 나는 자기 종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많은 설교를 했어.

이제 모든 사람이 내가 그것을 믿는지 보고 있는 거야."

 

바울은 다시 일어나서 자기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도운 것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였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노래로 모든 시험을 통과할 힘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11).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형제, 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기도가 자신에게 은사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돈이나 위로의 말, 혹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선행보다 훨씬 더 값진 것입니다.

 

저희 가족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큰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30 여 일에 걸쳐 저의 손녀딸 티파니는 저희 집에 누워있었습니다.

 

그것은 저희 가족의 삶 속에서 가장 힘든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간증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습니다.

갑작스런 불행이 우리에게 닥쳐왔고 우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시험에 부딪힌 것입니다.

 

티파니가 마지막 숨을 들이쉬던 마지막 순간

우리는 그녀의 침대를 빙 둘러 그녀의 손을 잡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은 것만큼이나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었던 분들의 기도로 세움을 입었다고

감히 간증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저희는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너무나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힘겨운 시험의 순간에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험으로 인해 진멸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미친 듯한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는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역뿐인 때가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고 편지했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묘사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디모데후서 4:1-5).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홀딱 빠져

바른 교훈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해라.

책망이 필요하다. 불순종하는 자를 징책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권고해라."

 

우리는 강력한 설교, 바른 가르침, 경건한 징책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곧 세상은 어떤 것도 듣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는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혀 교회를 완전히 무시할 것입니다.

설교나 교훈은 중독된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세계적으로 우리가 이미 이 지점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름뿐인 교회는 완전히 세상과는 별개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교회는 나라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에게조차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합니다.

도대체 어떤 사역이 이렇게 미쳐가는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까요?

 

아직도 무신론자, 이슬람교도, 각종 불신자들에게 선포하는 사역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깊고 힘든 고난을 통한 빛나는 그리스도의 광채입니다.

수 세기 동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성도들은 질병, 박해, 각종 고난으로 흔들림과 꺾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성도들의 사방에 있는 자들을 움직인 것은

그리스도의 빛나는 성품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간곡한 권고를 주목해 보십시오.

*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디모데후서 4:5).

 

바울은 "세상의 불신자들이 너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고난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주의해라.

네가 당하는 시험이 너를 믿음 없는 불평이나 슬픔으로 몰아가도록 허락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해 네가 했던 모든 말들이 신용을 잃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전도인의 일을 하며"(디모데후서 4:5). 제가 젊은 목사였을 때

저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병원 복도를 걷기만 하면 치유가 일어나는 기적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큰 증거가 될까. 환자들이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의심이 가득한 어떤 자도 확신을 가질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저는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신자의 입원실에 들어와서 설교를 하고 책망의 말,

바른 교훈을 늘어놓는 미소를 머금은 건강한 그리스도인과

가슴을 양쪽 다 도려내는 유방 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 누워있는

초라한 그리스도인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큰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이 여인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지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녀는 간호사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속사람의 평강으로 입원실을 가득 밝힙니다.

 

가장 냉소적인 불신자인 의사조차도 이 여성의 평안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그 의사는 그녀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평안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에게 다가옵니다.

 

저는 병원 사역을 경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하는 거룩한 소명이며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손녀 티파니가 죽기 전 마지막 여러 날 동안

저의 가정에서 있었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간병인이 저희 집에 매일 왔었습니다.

그는 우리 손녀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주 후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 그들이 때때로 우는 것을 보기도 해.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평안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게 뭔지 알아야겠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의 영이 고통 속에 있는 우리 가족에게서 빛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 "네 직무를 다하라"(디모데후서 4:5). 여기서 직무라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는

완전히 확신한 빈틈없이 준비된 이란 뜻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핵심은 "네 시험이 갑자기 네게 닥치기 전에 준비하라.

잘 무장하고, 영적 능력으로 가득 채워라. 그러면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하는 동안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힘든 고통이 그들을 낙심의 회오리 가운데로 던져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갖는 의문과 제기하는 의문들을 듣다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믿음의 창조자이심을 알았지만

믿음의 완성자이심은 진정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변화 받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영으로나 성품으로나 퇴보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변화와 변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로잡는 것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닮아갑니다.

우리의 성품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동성애라는 삶의 형태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그 인격이 점점 타락해 가는 동성애자들을 저는 목격해 왔습니다.

그들의 안색, 목소리, 습관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담대함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몇 년 전 뉴욕시에 거주하는 약 육칠백 명의 동성애자들이 5번가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자 퍼레이드에는 결코 참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의 성 정체성을 볼거리로 만드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그런 일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작년 반 누드로 그 퍼레이드를 이끈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포르노그래피로 인해 파생되는 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남자들은 여성의 누드사진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어린이 포르노의 수렁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기혼 남성들은 포르노로는 그들의 정욕을 채울 수 없어서 불륜을 저지릅니다.

한때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지금은 후회나 수치심도 없이 기꺼이 가족을 버릴 마음도 있습니다.

얼마나 이들의 인격이 신속히 붕괴되는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영적인 것으로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 종들은 자기 눈을 순결하고 거룩한 것에

고정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눈을 그리스도에만 고정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음 가운데 자신을 세우는 일에 사용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며

끊임없이 그들의 인격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러한 성도들만이 지구상에 닥칠 엄청난, 폭발적인 시험을 맞이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게으르고,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심장마비나 쇠약증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짓눌림을 당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 역사하셔서 변화시키도록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때가 닥치면 그들은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지금 불같은 시험을 겪고 계시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역가운데 집어넣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평하거나 흐느끼는 겁쟁이가 되어 여러분에게 주어진 소명을 훼방하거나

더럽히지 마십시오. 이 때를 위해 바울이 한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3-5, 10).

 

어떻게 우리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시련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소망의 빛을 발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비밀이 뭐야?

어떻게 그는 이런 시험을 견딜 수 있지?

어디서 그는 그런 평안을 찾은 거지?"라고 묻게 함으로써 진정한 풍요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준비를 시작하십시오.

예수님만을 독대하고 여러분의 눈을 그분께만 고정함으로

여러분의 창고를 가득 채우십시오. 그러면 어떤 것도 맞닥뜨릴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 마지막 시대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가 감당할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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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준비하라] 말씀이 영입니다!

묵상/Word-God|2019. 5. 5. 22:1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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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질(Temprament)의 변화:성화의 절정

묵상/Word-God|2019. 5. 5.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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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우상 내 자아 / 김철기

묵상/Word-God|2019. 5. 4. 21:44

 

우리 교회 형제 중에 브라질 육군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근무하는 35세의 형제인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는 모든 남방과 티셔츠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SOLI DEO GLORIA”

라는 글자를 새겨서 입고 다닙니다.

 

전에는 모든 영광을 내가 받으려고 하였지만

이제는 절대로 내가 영광을 받지 않고 주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겠다!

얼마나 훌륭한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시 형제가 그 글씨를 바라보면서

나는 주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어느 순간,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런가? 아니다. 내가 잘하고 있다.’

이 생각과 함께 본인의 자랑과 교만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이 선한 것이 나쁜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요?

죄인인 내가.. 내가 문제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이 선한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함이 문제입니다.

맞습니까?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을 거절하는 사람들

 

C. S. 루이스가 쓴 <거대한 결별>이라는 책에 보면

한 무리의 지옥 거주자들이 천국 부근으로 소풍을 나와서

만일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한 유령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에 있을 때의 자기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은 그래도 괜찮게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적이었다거나 완벽했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훌륭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권리가 아닌 것은,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지옥에서 사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보기에 그래도 괜찮고,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너무 비슷한 그런 고백 아닙니까?

 

자기 의는 어떤 것인가요?

 

내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자녀로서, 기독교인으로서,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

내가 이룬 성취가 .. 자기 의로 둔갑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 결정을 내릴 때 잘했다

하며 스스로에게 점수를 줍니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눈물로 밤을 새우며 이룬 업적 공로를 생각하면

뿌듯한 보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선교비 보내고, 십일조, 새벽기도, 철야기도,

이런 종교적인 성취에 의한 보람은 더 큽니다.

 

이런 성취들로 인해

나는 이런 (대단한, 남다른) 사람이다.’ 라는 식의

자기 존재감, 또는 자존감으로 형성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존감은

사실은 내 선함과 내 가치를 인정하면서, 자기 의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으므로

경건하고 열심 있다는 성도님들은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수여하시는 그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지 않고

내 가치를 인정하고 내 선함, 내 공로, 업적으로 탑을 쌓아갑니다.

자존감이 점점 커집니다.

 

세상은,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당당하고, 대접받고, 손해를 보지 않고

열등의식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자존감이 지나치게 높을수록

하나님과는 원수가 됩니다.

 

그럼 자존감이 낮으면 덜 문제아인가요?

마찬가지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것은

또 다른 열등의식의 피해자로

자기연민의 감옥, 다시 말해서 자아가 죽지 못하고,

자기 자아의 감옥에 갇혀서.. 스스로 괴롭게 살아갑니다.

 

왜 우리가 자기 의를 쌓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로마서 3:22~28절을 줄여서 말씀 드립니다.

인간은 모두 죄를 범해서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은혜로 거저 주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용서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의를 옷 입혀 주시고

천국에 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거절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십자가 보혈의 가치를

내 가치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함과 공로와 업적에

내 의를 같은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그 어떤 것이 없음에도

십자가에 흘린 그 피로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됩니다.

 

그럼 그 결과는 내가 내 공로와 선함과 업적으로

천국에 가겠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 의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자기를 의롭다고, 훌륭하다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몇 달, 몇 년 계속 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내 삶에서 주님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너무 심한 표현 같습니까? 그런데 사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자기 의를 쌓게 되는가요?

 

1. 너무 자연스럽게 자기 의는 쌓여집니다.

우리는 동기가 순수하면, 모든 게 선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떤 이유나 어떤 계산도 없었습니다. 순수하였습니다.

 

우리교회 교인 육군 대위가 모든 티셔츠와 남방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라고 수를 놓아서 붙이고 다니는

그 군인 형제의 동기가 순수합니까/악합니까? 순수합니다.

 

동기가 순수하였을 때,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있다. 뿌듯한 보람을 경험하는 순간,

내가 선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를 떠나십니다.

 

이것은 구제할 때도, 전도할 때도,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내 자신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때.. 우리는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죄 값을 전가시켜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면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그 초라한 자기 의 때문입니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조금 잘 믿는다는 사람들은, 내 스스로 내 선함과 가치를 인정합니다.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그 상한마음의 자리인데

우리는 쉽게 거기를 떠나서

자기 의와 자랑의 덫에 걸려듭니다.

 

주님께서도 마19:17에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만 선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도 이런 면은 선하다고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챕니다.

 

학교와 교회는 우리가 선하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 가치들이

우리 인생의 기둥 같은 역할들을 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인생을 살았느냐가

이 가치들을 얼마나 잘 성취하였느냐의 기준이 됩니다.

맞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성경적 가치관은,

그런 차원을 세상적 선한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합니다.

 

제 경우를 보았을 때, 구원받은 후에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순수하게 행하던 열심과 헌신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되게 사는구나!’

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순수하다 이것은 내가 마땅히 주님께 드리는 충성이다.’ 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모든 일반 회사원, 상인, 가정주부, 기업인, 공무원, 학자,

모두 순수하게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하여,

또는 자아실현을 위하여 순수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누가 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당연히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순수한 노력과 열심이 쌓일 때, 우리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이 자부심과 긍지가 바로 자신을 뿌듯하게 만듭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인정합니다.

스스로 봐도 내가 대견스럽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나를 못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경멸스럽게 보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 얼마나 순수합니까?

 

회개하는 것, 아무도 악한 동기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마저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회개한다, 회개했다 라는 그 지점에서

자기 의가 쌓여져 갈 수도 있습니다.

 

곧 자신의 선함이

천국 문을 열수 있으리라고 믿는데,

그건 본의 아니게,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거절하는 결과가 됩니다.

 

회개 .. 얼마나 순수합니까! 회개해야죠!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서도..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아니면 회개하고 나서.. 회개했다는 자기 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더라도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합니다.

 

남미의 아마존은 사람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는 환경입니다.

덥고, 습도가 높고, 무는 벌레 들이 많아서

현실 속에서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살던지,

도망을 가던지..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늘 마음속에 내 사역이 헛고생이 되면 안 돼,

나 한 사람 까닭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는가!’

 

그래서 아내와 자식들, 후원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게

아주 전투적으로 치열하게 사는 것이, 제게 익숙하여졌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사역하는 것, 정직한 것,

충성스러운 것, 헌신적이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인디오 형제들과 같이 비가 새는 집에서 수년을 사는 것,

 

교인 중에 한 가정도 슬라브집이 없고 모두 양철집에 거주하므로

선교사인 저도 그들과 같이 양철집에서 살고

모든 것에 절제하고

 

세상에 이름이 알려질까 봐 그렇게 많이 받았던 방송출연과

다큐멘타리 제작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디오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약속을 하면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에도 스피드 보트로 아마존 강을 달렸습니다.

 

만일 칠흑 같은 그 밤에 보트가 전복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끔 함께 하였던 단기 팀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런데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해 듣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인디오 형제들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진짜 선교사로 살고 사역하는 것,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더 충성하고 더 헌신하고 싶었습니다.

 

내 한 몸을 부셔서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다면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 십 년 시간이 지나면서

사역도 커지고 열매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어느 틈엔가 내가 잘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여지고

그렇지 못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제 안에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내를 잃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빛을 비추시니

그렇게 내가 충성하며 치열하게 살며 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주님을 대적하는 모두 악하고 악한 것이었음을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열심과 헌신으로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주님을 섬기면서도

늘 자신을 부인하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열심, 내 헌신, ‘내 자랑과 내 공로가 될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십자가의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부인하는 꼴이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서 집을 나갔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첫째 아들이 선합니까, 악합니까?

 

둘째는 패륜아 이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고,

첫째는 인정받을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 첫째 아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실하게 아버지를 도왔다는 자의식,

자기 의가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주님을 믿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그렇게 시작하였는데

 

내가 주님을 기쁘시려고 무엇인가를 했을 때

겸손이 점점 줄어들고

자기 자랑과 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0:3절에 유대인들이 힘써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였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또는 순종한다는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 독사의 새끼, 회칠한 무덤,

너희는 입술은 가까우나 마음은 내게서 멀다!’ 라고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 장로

서기관은 신학교수

사두개인은 사회지도층, 지배계층입니다.

 

사실은 오늘날 21세기에도,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교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의 자존심을 밟아버리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죽여버리자는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9:30~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유대인들은 그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으로,

무엇을 한다는 그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 당시 찌질이처럼 살았던 창녀 세리들은

자기 의를 버리고 단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여서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3. 늘 비교하며 우위를 가리기 때문에 자기 의가 쌓입니다.

 

여러분은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까?

누군가 고의적으로 아니면 무심코 던지는 말 또는 표정으로부터 상처를 받습니까?

 

우리가 주님 밖으로, 세상으로 나가면

마귀는 곧 상처를 줍니다. 상처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저희 교회는 매년 부활절 아침에 전 교인이 아침식사를 같이 합니다.

올해 부활절 아침에 제가 아침식사 하는 의미를 소개하면서

빵을 손으로 집었더니 옆에 있던 교인 여의사가

더러운 손으로 빵을 집지 마세요, 장갑을 끼고 집으세요.”

 

그 순간 모든 교인들이 충격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찰나, 제가 웃으면서

이 손은 더러운 손이니, 여러분은 장갑을 꼭 끼고 빵을 집으세요.’

여의사의 말에 동의한 것이지요. 그렇게 넘겼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그 여의사가 그렇게 말했다면, 뒤집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내 손을 더러운 손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물질은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난은 일만 악의 뿌리다.’ 라면서

그래서 모두 부를 가져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내 물질, 권력, 지식, 종교적인 헌신 누가 누가 잘하나?

자기 의가 커질수록 자아가 확장되고 자존심이 커집니다.

 

어디에서나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어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고 대접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에게서 가족들에게서 친구들에게 교회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왜 자기를 몰라주고 인정해 주지 않는 섭섭함 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고의적으로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상처가 되는 표정이나 말을 할 때,

나는 사실 그 사람이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상처를 받겠습니까? 받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살해한 죄인이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세상에 없다 생각하면,

십자가 그늘 밑에 숨어 있으면, 주님 안에 있으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밖에 나가면

마귀가 쏘는 독화살을 매번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훌륭하다. 그런데 누가 내게 감히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표정을 지어?’

그래서 상처를 받습니다.

 

나를 인정하여 달라고 물질도 명예도 종교적인 헌신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우위를 가리므로 자기 의를 쌓아갑니다.

 

가끔 자주, 우리는 세상에 뭇욕을 먹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누구보다는 낫다.

 

C. S. 루이스가 쓴 <거대한 결별>에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는 말처럼

'나는 그래도 괜찮게 살고 있다. 완전히 신앙적이거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훌륭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줍니다.

 

이렇게 우열을 비교함으로 자기 의를 쌓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알아달라고

온갖 몸짓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자기 의는 자아의 기본요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 의는 커질수록 더 교만하여 커집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짓밣는 일이다.

그래서 주님이 결코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의를 거절 할 수 있는가요?

 

나는 죄인이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무엇을 하여도 선을 이루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서 또는 선을 행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왜 죽으셨겠습니까?

내가 주님 앞에서 뭘 한다는 것이 모두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 율법을 폐기하라는 말인가요?

회개, 선교, 교회 행사, 하지 말라는 것인가요?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행할 때,

아벨이 제사를 지낼 때 가졌던 그 마음,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이 동물이 대신 죽는다.’

그 미안함 죄송함 감사를 품고 모든 일을 하십시오.

 

주님이 복음서에서 종이 주인과 같이

일하고 돌아와서 상을 차리고 시중을 들고 난 후에라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라고 가르쳐 주셨듯이

 

제가 그 무엇을 한다 한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는 전혀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십시오. 그럼 자기 의가 쌓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안함과 감사함만 더 쌓입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였던

그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음 상한마음을 유지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더 높임을 받으십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하면 우리가 산 제물로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결코 자기 의를 쌓으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밤에 마귀가 가라지를 뿌리고 갔듯이

자기 의는 쌓여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말로다 할 수 없는 사랑,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자기 의를 깨뜨려 주시러 찾아오십니다.

 

어떻게 우리 의를 깨주러 오시는가요?

고난으로 찾아오십니다.

 

고난이 오면 우리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생깁니다.

 

82세된 장로님께서 30년 가정예배를 드리셨답니다.

병원에 가셔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퇴원하셔서 집에 들어오시는데

거실에 있던 성경을 보자 그 성경을 패대기를 치고 싶으셨답니다.

 

‘30년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예배 드렸는데

내게 고작 이런 대접을 해주십니까?’ 하며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고 충성하고 헌금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선교비를 보내고

눈물로 회개를 하나님 사랑한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였는데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내게 갚아주셔? 뒤집어 집니다.

 

이런 경험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그때 우리 숨겨졌던 악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비로소 그때 우리 악함이 공개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서 한 것이었구나.

나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구나.

내가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았구나.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다는 것들이 모두 내 왕국을 건설하는데 쓰임을 받았구나.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과 원수로 살았구나.’

 

그때 하늘이 노랗게 변함을 느낍니다.

그때 가장 진실된 회개가 나옵니다.

 

이 깨달음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상입니다.

믿으십니까?

 

저와 33년을 함께 하고 지금은 아마존의 가장 큰 별이 되어 하늘에 떠 있는

아내 허운석 선교사는 2006 11월 폐암진단을 받고

이 폐암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보상이라고 기뻐하였습니다.

 

허 선교사가 말기 암 통증을 품고 자기 생명을 소진하면서 설교했던 그 내용들을

책으로 만든 <내가 왕 바리새인입니다> 책을 읽으셨습니까? 꼭 읽으십시오.

 

이제 곧 두 번째 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기도하여 주십시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자기 의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고난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방문을 받고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감사하시고 기뻐하십시오.

그러니 지금의 고난을 받으시면서

주님, 저의 의를 깨트려 주십시오.

제 자아를 완전히 죽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님께서 지금까지 내가 행했던 모든 것은 악하고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은 내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구나.

내가 한일은 죄밖에 없었구나.’

라고 깊이 회개하도록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의무들은 수없이 찬란한 죄들과 같다.

우리는 죄에 넌더리를 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의무와 성과들까지도 메스꺼워 해야 한다.

 

먼저 마음의 깊은 회심이 있어야만

당신 마음에서 마지막으로 꺼내야 할 우상 <자기 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깊은 회개가 있어야

비로소 <마지막 우상인 자기 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시고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시기를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자기 의가 없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자기가 하였던 모든 것을 자기가 하였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그런 기억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 의가 다 깨지면 주님만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내 인생이 망한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내가 망하지 않았으면

내가 천국에 못가고 스스로 지옥을 택하여 갔겠구나.

내게 주어진 이 고난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려 했던 보상이구나.’

그때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이런 감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홀로되신 분들이 계십니까?

제 인생에, 제가 50대 후반에 홀아비가 되리라 생각을 했겠습니까?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제 인생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다른 분들에게 부담을 주는 초라한 홀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서 자기 의가 깨지니.

슬프게 하셔서 아프게 하셔서 외롭게 하셔서 울게 하셔서

천대 받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자기 의가 깨진 사람은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생각하니 언제나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사랑할 분이 그분밖에 없으므로

3:3말씀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분과 함께 걸어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생애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주님 안에서 인생 최고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과의 동행으로 인한 행복입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실제가 되어 저를 평안과 감사와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저처럼 홀아비가 되지는 마시고

제게 있는 이런 행복한 날들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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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주목하지 말고 성령님을 주목하시라 ⁄ 프란시스 챈

묵상/Word-God|2019. 5. 4. 16:24

 

녹취록 http://blog.daum.net/rfcdrfcd/1597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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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람

묵상/Word-God|2019. 5. 4. 15:26

태그 : 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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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죽어야 열매가 나타난다

묵상/Word-God|2019. 4. 28.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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