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옳은 행실. 이 말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들과 조화를 이루는 ‘의로운 행위’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깨끗한 세마포 옷은 신부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옷이다(사 61:10, 계 7:10). /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신 옷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옷 곧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입혀 주실 것이다.
미련한 처녀 ⇨ 바깥 어두운 곳 마련한 처녀가 미련한 이유 – 알면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 영접후 바로 취하시면 문제가 없을 텐데....
*이 세상 영역에서 우리가 존재(생활)한 데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 영원한 위치(하늘에서의 포지션)가 결정된다. 군대에 제대 할 때 령관급으로 제대 했는지, 장성으로 제대 했는지, 무슨 계급으로 제대 했는지에 따라 혜택이 천양지차 인것처럼 심판, 평가, 행위를 기록한 책에 의해서 우리의 상급과 면류관과 거처가 결정지어진다. 땅땅~! 하고 판결이 내려진다. 아~ 부끄러운 구원의 사람들이여...
*당신은 미련한 처녀이다. / 당신은 주님을 알았다. / 당신은 구원을 위한 그분의 십자가도 믿었다. 그러나 / 당신은 실제로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 살았다. / 당신은 당신의 등잔에 기름(성령과 함께 회개와 사랑을)을 채우지 않았다. / 당신은 영생을 받았지만 땅 위에서의 당신의 삶을 허비해 버렸다.
*미련한 처녀는 →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 → 삶을 낭비 허비하는 삶, → 부끄러운 구원으로 겨우 음부를 면한자로, → 낙원에 겨우 들어간 자로 →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들 이었다.
*그들은 미련한 처녀들로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고 있어야 했다. 그들이 낙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삶을 낭비해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때 그들이 겪었던 그 비통함은 세상에서 가질수 있는 어떠한 슬픔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비통의 어두움이란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어두움은 그들이 져 버렸던 주님의 영광 앞에서 드러날 때 더욱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어두운데서 이를 가는 절대 후회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알고서도 계속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겨우 낙원에 와서야 그것의 실체를 배우게 되는 것은 세상 영혼이 경험을 초월하는 큰 슬픔이다. 그렇다 그들은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이 바깥 어두움의 고통을 당했던 자들 이다.
*작은 잘못은 작은 후회들로 잊고 넘어갈 수 있지만, 엄청난 후회,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후회는 슬프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를 갈만큼의 비통함과 어두움이란.
*진정한 자신을 위한 삶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내세를 위한 이 땅에서 의 희생의 삶이다.
*그가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 비록 낙원에 겨우 머물를 수 있었지만 그는 오직 은혜로 그곳에 있으며, 받은 구원에 대해 너무나 감사 할 따름일 것이다. 지옥에 안 간것이 어딘가?
*당신의 삶의 하나 하나가 하늘에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가? 그래서 축복받은 자여...
*행위를 기록한 책에 당신의 행위가 기록되어 지는 것을 위해서 살아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낱낱이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땅위에 인간들의 책에 당신이 어떻게 기록 되어지는 것은 어떠하든 조금도 개의치 말아라. 지금 당신의 마음과 행위가 천사에 의해 녹화 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알현한다.
문제가 중대하고 심각한 것은 교회는 예수님이 오늘이나 내일 오실지 모르는 이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고, 성취 되어질, 특별히 남은 세 가지 예언인 휴거와 칠년 환란과 재림을 기록해 놓은 마지막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모르고 있고, 잘 못 알고 있고, 가르치지 않고 있고,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 달란트 비유를 보면 누구든지 태어날 때 다 달란트를 받으며 그 받은 달란트를 죽을 때 회계 한다고 나와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영혼 구원이고, 그 달란트는 영혼이라 가정 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열악한 두두자마을(선교지)에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는 한 달란트(자기의 영혼의 분량)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삶이 어렵고 힘들었다 할지라도 그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으면 하나님이 그에 의한 손익분기점을 찍은 본전은 한 셈이지만, 그가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분은 땅에 감추어둔 종을 안타까워 하실 것이다.
*그런 것과 같이 어떤 형태로이든 그의 희생으로 인해 한 영혼이라도 구원 받게 한다면 그는 한 달란트를 남겨서 그분의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물론 세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남긴다면 그분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딤후 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 도 있나니...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그릇의 재질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지는 않는 것 같다. 귀히, 천히 쓰는것을 주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금 그릇도 천히 쓰실수도 있고, 질 그릇도 귀히 쓰실수도 있으시다는 말로 들린다. 그릇의 종류에 관계없이 자기를 죄에서 멀리해 깨끗하게 한다면, 거룩한 그릇으로 합당하게 쓰인다고 말씀 하신다.
사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두두자 거민들)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두두자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수 있게하나, /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나, /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수 있나, / 어떻게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수 있나. / 어떻게 그분께 양도해 드릴 수 있나. 이들은 사랑의 분량을 적게 받은 자로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자들인가 / 누구를 더 사랑 하신다? / 아니면 무수히 공평히 사랑하신다? / 아니면 한 사람, 한 사람 특별히 사랑하신다?
*우리는 누구나 이땅에 도착할 때 받는 사랑의 분량이 있다. 달란트의 양이 있다. 당신의 분량은? 당신이 받은 달란트 양은 얼마인가? 당신이 이미 받았으나 그래서 이미 알고 있었으나 아는 것을 따라 살지않고, 또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세에는 책임이 동반된다. 더 많은 권능을 받을수록 더 큰 책임과 의무를 해야한다. 선한 것을 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악에 대한 잠재성을 그만큼 더 받는 것이 된다.
*아담이 온 인류를 매우 영광스러운 미래로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나 그의 잘못으로 수십억의 영혼들을 가장 참혹한 운명으로 끌고 갔던 것처럼, 권세에는 책임이 동반된다. 더 많은 권능을 받을수록 선과 동시에 악에 대한 노출과 잠재성을 그 만큼 더 받게 되는 셈이다. (예수님의 권세와 권위는 최종이다. -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대가 지불로 인한)
*주님과 함께 모든 시대를 다스리게 될 자들은 가장 심오한 종류의 책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홀로 서 있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이해를 훨씬 넘어 멀리까지, 심지어 다가오는 세대들 까지라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목사, 교사, 가르치는 자들이 받는 권세에 따라 악에 대한 잠재성(교만 해지기 쉬운)을 갖게 된다. ⇨ 권세와 권능을 받는 목사, 선교사들은 악에 대한 잠재성, 즉 희생과 고통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일반성도들이 가야하는 멀고 긴 가려진 여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출애굽시 바로와 백성들의 고통, 예수님 탄생 시, 모세 탄생시 희생 되었던 많은 영혼들.
*시각을 잃으면 청각이 발달하듯이, 다리를 잃으면 팔이 강해지듯이, 몸의 한부분이 강하면(권세) 다른 부분은 약해 (악에 대한 잠재성 ⇨ 희생)지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부분으로써 지체의 다른 한 부분이 아프면 머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곳이 아프듯이 누구든 홀로이지 않다.(함께 아파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지체(부분)는 오히려 그것을 사용해서 뭔가를 누린다. / 섬김 받는 것, / 존경 받는 것, / 누림 받는 것, 등 복음을 전하는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는 자로써 그 사역들을 사용, 이용, 오용해서 자기의 기쁨과 영광을 구하고 누린다.
그렇다. \ 내가 형통하다면 누군가에게 고통이 있다. \ 내가 편안 하다면 누군가 불편하다. \ 내가 쓸데없이 풍족하다면 누군가 부족하다. 주신 것 중에 내가 많이 가지고 누린다면 못 가져서, 부족해서 못 누리는 형제자매가 있다.
*마지막 날의 교회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전에 결코 보여 진 바 없는 방법으로, 주님의 성품과 주님의 방법들을 보여주시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요구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주님이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믿기에 땅에 속한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매 순간 하늘의 가치를 선택하며 나의 넉넉한 것으로 지체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삶을 살아,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 나그네의 삶이 실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가난케 되심은 그 부요함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 연합은 친히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생명의 본질이다. 그 예수님의 생명으로 연합한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하여 평균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을 때도,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의 삶을 가능하게 한 복음의 능력 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와 같은 모본을 따르지 못했다.
"나눔과 섬김에 인색해 자기밖에 알지 못하는 저의 불의를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결단합니다. 재산과 생명, 지식, 기도, 재능, 은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모든 소유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 나님께 드려진 이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언제든 부족한 곳에 이 모든 것을 나누는 통로로 서서, 자신의 넉넉한 것으로 현재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삶을 살아 드릴것을 결단합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으로는 가능합니다 주님 도와주옵소서.. 나 자신의 의로는 불가능 하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부족하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형제의 부족 한 것을 보충하여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아멘.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눅 12: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마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