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인가 [그 나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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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선목회자의 성경기초주제어풀이 4] '십자가'인가 아니면 '그 나무'인가 [5] - 다시 한번 <십자가>(CROSS) 용어를 제거하고 <그 나무>(THE TREE)로 성경기록들을 회복하자!!
이제는 <그 나무의 비밀>을 을 밝힌다!!
[죽음의 육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그 통나무 위에 못박힘'으로 죽으셨다!!
[생명의 영체] 그러나 그 분은 '한 살아있는 나무'에 달리심으로 그 죽음으로부터 생명에로 다시 나셨으니, 곧 부활하심이었다!!
[참십일조의 소망] 이제 성도들의 마지막 소망은(골로새서 1:5)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굳게 믿고, 그 분과 함께 '새창조'에로 동참하는 것이다!! 시간이 허락되면, <창세기>를 중심으로 '십일조'를 풀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진리는 '십일조'는 하나님이 '떨어져 나간 자들'(네필림/창세기 6:4) 가운데서 다시 뽑아내어(요한계시록 18:4) 본향에로 회복시키시려고(누가복음 15:11-19), 독자를 드리면서까지(창세기 22:13/요한복음 19:30) '잃은자'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하나의 그림자로서 '첫태생, 첫것, 맏물'로 드러낸 예표였던 것이었지, 그것의 실제 표상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과 함께 신비적 연합을 이룬 신부'를 나타냄이지, 물질이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들어가면서]
6:14Be ye not unequally yoked together with unbelievers: for what fellowship hath righteousness with unrighteousness? and what communion hath light with darkness? 6:15And what concord hath Christ with Belial? or what part hath he that believeth with an infidel? 6:16And what agreement hath the temple of God with idols? for ye are the temple of the living God; as God hath said, I will dwell in them, and walk in them; an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shall be my people. 6:17Wherefore come out from among them, and be ye separate, saith the Lord, and touch not the unclean thing; and I will receive you, (2 Corinthians 6:14-17, KJV)
6:14너희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그러니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동참하겠느냐(나누겠느냐)?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 6:15그리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느냐? 아니면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교제하겠느냐? 6:16그리고 하나님의 그 성전이 우상들과 어찌 함께 있겠느냐(합의하겠느냐)? 이는 너희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성전임이라. 하나님이 말씀해오시기를, '내가 그들 안에 살겠고, 그들 안에 행하겠고, 그리고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고, 그들이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하셨도다. 6:17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하신다. (고린도후서 6:14-17, KJV화중광야역)
[사탄은 구약에 없는 용어 '십자가'(CROSS)를 교묘하게 삽입하였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도다. 그러하니 이제부터 너(여호수아)와 이 모든 백성은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주는 그 땅을 향하여 가라. (KJV화중광야역)
위 본문은 <여호수아 1:2>의 구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건너다'를 'go over'에서 'cross'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꼭두각시들이 교묘하게 성경을 변질시켜 놓음으로써 <그 말씀의 참뜻>을 혼돈시키려는 고도의 술수임을 알아야 한다. <새국제역>(NIV/NEW INTERNATIONAL VERSION)을 보면, 구약을 이렇게 변질시켜 놓은 것이 부지기수이다. <여호수아서>를 확인해 보니, 다음과 같이 'go over'를 'cross'로 변질시켜 놓았다: 1:2,11,14; 3:1,14,16,17; 4:1,7,11,12,13,22,23; 5:1; 15:3,10; 16:2; 18:13; 24:11.
예수님은 구약을 성취하시려 이 땅에 오셨다(마태복음 5:17). 구약 속에는 <십자가>(CROSS)니, <십자가에 못박다>(CRUCIFY)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CRUCIFIXION) 이라는 용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NIV>를 제외하고 말이다!! 누가 이 대죄를 범하였는가!!
구약성경에서는 <나무>에 대한 히브리원어상 <Bishops Bible>은 이 모두를 동일하게 '나무'(WOOD)로 번역해 놓았다!! '나무'는 히브리원어 '에츠'(H6086)로서, '아차'(H6095) '견고하게 하다' '단단하게 하다'에서 유래되었다. 아브라함이 <나무>를 심었고, <그 나무>를 아들 이삭을 하나님에게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사용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나무>에 대한 헬라어 원어상 다음 두 가지 의미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이 한 <나무>에 매달리셨다고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증언하는데, 이 때 사용된 헬라어는 '크쉴론'(ξυλον/xulon)이다:
1. 사도 베드로의 증언 (베드로전서 2:24)
친히 우리의 죄들을 자신의 몸으로 지시고 그 나무(크쉴론/ξυλον)에 달리셨으니, 이는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 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KJV화중광야역)
Who his own self bare our sins in his own body on the TREE, that we, being dead to sins, should live unto righteousness: by whose stripes ye were healed.
2. 사도 바울의 증언 (사도행전 13:29)
그리하여 그들이 그 분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한 후에, 그들이 그 분을 그 나무(크쉴론/ξυλον)에서 내려, 그 분을 한 돌무덤 속에다 안치하였는데 (KJV화중광야역)
And when they had fulfilled all that was written of him, they took him down from the TREE, and laid him in a sepulchre.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 한 <장대/통나무>를 지셨다고 말한다. 이 때 사용된 헬라어는 '스타우로스'(σταυροζ/stauros)이다:
1. 사도 요한의 증언 (요한복음 19:17)
그리고 자기의 장대(스타우로스/σταυροζ)를 지신 그 분이 히브리어로 골고타로 불리우는 한 해골의 장소로 불리는 한 곳을 향하여 가셨다. (KJV화중광야역)
And he bearing his CROSS went forth into a place called the place of a skull, which is called in the Hebrew Golgotha.
<마태복음 10:38>을 시점으로 해서, 신약에서 최초로 'CROSS'가 언급된다:
그리고 자기의 장대(통나무/십자가가 아님)를 취하지 아니하고, 나를 따라오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다. (KJV화중광야역)
And he that taketh not his CROSS, and followeth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이 때는 주님이 아직 <그 나무> 위에 죽임을 당하시기 전이며, 공생애 중이시기 때문에, 'CROSS'라고 언급하셨는데, 이 'CROSS'의 헬라원어가 'σταυροζ'(스타우로스)이다.
이 'CROSS'는 하나의 <나무>(TREE)가 아니며, 결코 하나의 <나무>가 될 수 없다. 흔히 볼 수 있는 로마 십자가는 전기를 통하는 '전주'(電柱)에 사용되는 나무 기둥들이다. 이것들은 '죽은 나무조각 두 개를 못박음으로써 구성된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아무리 오랜 기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어도, 뿌리들과 잎사귀들을 내지 못한다(아래 이미지).
우리가 보편적으로 배워 알고 있는 라틴어 'CRUX'에서 영어 'CRUXIFY'(십자가에 처형하다)가 파생되었고, 그것의 명사형이 'CROSS' 곧 '십자가'라는 기존의 전통적인 개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뜻에 대치되는 '황폐함의 그 가증함의 극치'(마태복음 24:15)인 것이다.
이 용어를 '십자가'(CROSS)로 번역한 것은 '부적절한' 영어번역이다. <킹제임스성경>의 저본들인 <틴데일성경>과 <제네바성경>에도 'CROSS'로 번역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킹제임스성경>이 이 부적절한 번역을 'WOOD/STAKE/TREE'(곧은 장대/곧은 통나무/곧은 막대기)로 올바르게만 번역해 놓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 '기초주제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킹제임스성경 신약> 속에 언급된 '십자가'(CROSS)니, '십자가에 못박다'(CRUCIFY)니, '십자가에 못박았다'(CRUCIFYIED) 용어들을 모두 끄집어 내어서, 그것들을 정확하게 영어로 번역해 보았다. [킹제임스성경에서 필히 바뀌어야 할 용어 'CROSS' (시안)/ 자세히보기].
이것은 변질된 성경들이 성경기록들을 혼돈시키고 있는 그 저의를 경계하고자 함이요, 깨닫고자 함이니, 비록 이렇게 <화중광야> 웹사이트에서 마치 큰 바위덩이를 계란으로 맞서려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하지 마시고, 제대로 배우고 깨우쳐서 전도하시길 바란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등잔대와의 관계성]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내려다 보이는 '올리브산'(Mount of Olive)에서 '골고다'에 이르셨고,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지 않으시고, 머리 위 한 곳으로 모은 채, 지고 오신(후에 구레네인 시몬이 대신 지고 옴) 그 통나무/장대(죽어 있는) 위에 못박히셨고, 그 상태로 한 커다란 올리브나무(살아있는) 위에 달리셨다.(아래이미지 참조) 이것이 무슨 말인가??
위 이미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일한 나무 위에 다른 두 사람이, 곧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한 사람은 오른편에,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왼편에 함께 못박혔다. (마태복음27:44. 마가복음 15:32. 요한복음 19:32. 로마서 6:6. 갈라디아서 2:20).
19:31The Jews therefore, because it was the preparation, that the BODIES (plural) should not remain upon the CROSS (singular) on the sabbath day, (for that sabbath day was an high day,) besought Pilate that their legs might be broken, and that they might be taken away.19:32Then came the soldiers, and brake the legs of the first, and of the other which was crucified with him. 19:33But when they came to Jesus, and saw that he was dead already, they brake not his legs: 19:34But one of the soldiers with a spear pierced his side, and forthwith came there out blood and water. 19:35And he that saw it bare record, and his record is true: and he knoweth that he saith true, that ye might believe. (John 19:31-35, KJV).
19:31그러므로 그 날이 예비일인 까닭에, 그 시신들(복수형)을 그 안식일에 그 장대(단수) 위에 남겨두지 않으려고 (이는 그 안식일은 큰 날임이라), 그 유태인들이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들이 꺾이고, 그것들이 치워지도록 요청하였다. 19:32그러므로 그 군인들이 왔고,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 못박힌 첫째 사람의 두 다리를 꺾었고, 또 한 사람의 두 다리도 꺾었더라. 19:33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게 이르러서는, 그 분은 이미 죽으신 것을 보았고, 그들은 그 분의 두 다리를 꺾지 않았고, 19:34다만 그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한 창으로 그 분의 옆구리를 찔렀고,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19:35그리하여 이것을 본 목격자가 증언하였고, 그의 증언이 진실이라.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이 진실임을 아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9:31-35, KJV화중광야역)
사탄은 교황 콘스탄틴을 유혹하여 세 개의 로마 십자가의 허상을 조작시켰다!!
위 성경 본문을 통해서 보면, 그 병사들은 하나의 원형(CIRCULAR)의 동작으로 움직인다. 북동쪽(NORTHEAST), 곧 예수님의 우편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병사들은 첫째 행악자의 두 다리를 꺾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남동쪽(SOUTHEAST)으로 이동하여 예수님의 왼편에 못박힌 두번째 행악자의 두 다리를 꺾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예수님에게 이르렀고, 그 분이 이미 죽으심을 알았다. 그 병사들 가운데 한 병사가 창 하나로 그 분의 옆구리를 찔렀고, 피와 물이 나왔다. 자, 만일 3개의 별개의 '십자가형틀'(십자틀/예수셩교젼셔 1887)의 날조(허구)가 진실이라면, 그 병사들은 첫째 행악자의 두 다리를 먼저 꺾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에게 이르러 그 분의 두 다리를 꺾었을 것이요, 마지막 또 다른 행악자에게 이르러 그의 두 다리를 꺾지 않았을까...!! 성경의 진실은 이러하다!!
이 증거를 성경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킹제임스성경 번역>과 헬라어 사본인 <표준원문>(Textus Receptus) (Trinitarian Bible Society, 1997 발행)을 인용한다:
1. 명사 '스타우로스'(σταυροζ)의 동사형 '스타우로오'(σταυροω) 용례이다:
<마태복음 27:38>
Then were there two thieves crucified with him, one on the right hand, and another on the left. (KJV)
τοτε σταυρουνται συν αυτω δυο λησται ειζ εκ δεξιων και ειζ εξ ευ ωνυμων (TR/표준원문)
[풀이] σταυρουνται(동사 crucified/못박혔다) +συν(전치사 with/~와 함께) +αυτω(목적어 him/Jesus/그분 곧 예수님)
2. 동사 '스타우로오'(σταυροω)와 전치사 '쉰'(συν)의 복합어 '쉬스타우로오'(συσταυρω) 용례이다. :
<마태복음 27:44>
The thieves also, which were crucified with him, cast the same in his teeth. (KJV)
το δ αυτο και οι λησται οι συσταυρωθεντεζ αυτω ωνειδιζον αυτω (TR/표준원문)
[풀이] συσταυρωθεντεζ(복합동사 were crucified with/~와 같이 못박혔다) + αυτω(목적어 him/Jesus/그분 곧 예수님)
여기서 전치사 '쉰'은 <분리>가 아니라 <결합, 연합, 일치>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과 같이 못박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로써 본절은 예수님과 두 행악자들이 <동일한 한 나무에 같이 못박혔음을 증거> 해준다.
그 분과 함께 고통(죽음)에 못박힌 그 행악자들도 똑같이 그분(예수님)을 욕하였다. (KJV화중광야역)
<갈라디아서 2:20>의 사도 바울의 증언을 들어보자: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KJV)
χριστω συνεσταυρωμαι ζω δε ουκετι εγω ζη δε εν εμοι χριστοζ ο δε νυν ζω εν σαρκι εν πιστει ζω τη του υιου του θεου του αγαπησαντο? με και παραδοντο? εαυτον υπερ εμου (TR/표준원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는도다. 그런데도 내가 살아 있으니, 오로지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이라. 그러니 내가 지금 살 속에 사는 삶은(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던 하나님의 그 아들의 그 믿음을 통하여 사는 것이라. (KJV화중광야역)
[풀이] 여기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는도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σταυροζ/스타우로스)에 동참하여 죽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도 이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울러 그리스도의 살과 같이 신비적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로 소망을 바라보게 된다.
메시야의 이런 방식으로의 죽음의 예표는 예호바(여호와)가 모세에게 주의깊게 알려주신 등잔대(MENORAH/CANDLESTICK/일곱등잔대/아래 이미지)를 통해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너는 순금으로 한 등잔대를 만들지라. 두들겨서 만든 것으로 그 등잔대는 만들어 질 것이요, 그 대와, 그 가지들과, 그 대접들과, 그 꽃받침들과, 그 꽃들을 같은 데서 나오게 할 것이라. 그리고 여섯 가지들이 그 등잔대의 양쪽에서 나오게 할 것이요, 그 등잔대의 세 가지들은 한 쪽에서 나오게 하고, 그 등잔대의 세 가지들은 다른 쪽에서 나오게 할 것이라. (출애굽기 25:31-32, KJV화중광야역)
And thou shalt make a candlestick of pure gold: of beaten work shall the candlestick be made: his shaft, and his branches, his bowls, his knops, and his flowers, shall be of the same. And six branches shall come out of the sides of it; three branches of the candlestick out of the one side, and three branches of the candlestick out of the other side" (Exodus 25:31-32, KJV).
그리고 내게 전하신 그 음성을 알아보고자 내가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보니, 나는 일곱 금등잔대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일곱 등잔대들 한 가운데에 사람의 그 아들 같으신 분이 발까지 내려온 한 의복을 입으셨고, 가슴에 한 금띠를 두르고 계셨다. (요한계시록 1:12-13, KJV화중광야역)
And I turned to see the voice that spake with me. And being turned, I saw seven golden candlesticks; And in the midst of the seven candlesticksone like unto the Son of man, clothed with a garment down to the foot, and girt about the paps with a golden girdle. (Revelation 1:12-13, KJV).
자, 예수님은 '일곱 금등잔대들'에서 한 가운데 중심을 이루고 계신다. 랍비 문크(Munk)에 따르면,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과 땅 사이를, 하나님과 유한한 가시적 창조 사이를 연결하는 상징'(It is the link between heaven and earth; between God and the finite physical creation)이라고 한다. (J.R. Church & Gary Stearman. The mystery of the Menorah. p.119)
지금도 예수님의 존재에 관하여 갖가지 억측을 도입하여 인본주의라고 하는 종교도구로써, 인간의 한정된 뇌세포 조직 안에서 풀어나가고 있는 자들이 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혼인을 했느니, 예수님은 가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총각이라서 포도주로 달래는 술꾼이었다느니, 예수님은 흑인이었다느니, 예수님의 키는 160센티 안팎이었다느니, 예수님의 머리는 길었다느니 짧았다느니, 등등의 이론으로 성경 속의 신비를 혼돈시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는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난다 하였는데(지금이 바로 그 때임), 인간이 모방할 수 있는 핵심은 전혀 성경 속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과 장차 이 땅에 심판주로 오실 그 모습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8-20>에는 '예수님의 참모습'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듯 하다. 기회가 주어지면, 이 주제도 상세하게 풀어보려고 기도중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된 나무들]
성경 속에는 무려 30여종이 넘는 나무들이 열거되어 있다. 구약의 경우, 솔로몬 성전 건축에 주요 자료로 쓰인 레바논의 '백향목'(Cedar)이외에도, 신약에서는 '올리브나무'(Olive Tree)와 '무화과나무'(Fig Tree)가 강조된다. 이러한 유추(類推)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영적 성전'(spiritual temple)을 지어가는 시대요, 그 주체들은 거듭난 신초(信草/believers)들, 곧 성도들인 '참십일조들'인 것이다!!
(창세기 6:14)
Make thee an ark of gopher wood; rooms shalt thou make in the ark, and shalt pitch it within and without with pitch. (KJV)
너는 고펠 나무로 방주 하나를 만들되, 곧 너는 그 방주 안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수지(樹脂)로 그것을 안과 밖으로 입힐지라. (KJV화중광야역)
◆ 필자가 성경을 연구하는 중에 찾아 낸 가장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려낸 방주의 모습이다. (William T. Bobson. The History of the Bassan Bible. Edinburgh: William Blackwood And Sons. 1887. p.143).
'고펠나무' (Gopher Wood) 히브리어로서 아람어 '유숙하다' 어근에서 유래됨. '얇은 조각나무' (laminated wood)라는 의미로서, 나무 조각이 겹겹이 붙여지면 외부의 힘이 강해진다. 이것으로 방주의 바닥에 깔았을 것으로 입증된다. 고고학자 '론 와이엇'(Ron Wyatt)의 발견에 의하면, 접합체 물질(나무에서 얻은 수지, 송진)이 판자 끝에 흘러나와, 굳어져 화석 형태로 남아있었다. 이것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방주의 바닥과 외부면에 '역청'(pitch)을 바른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노아가 사용한 방주 건설방법은 '얇은 조각나무'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Ron Wyatt, Discoveries Volume, Wyatt Archaeological Research, 1995. p.36).
(창세기 21:33)
[Abraham] planted a tamarisk (Eshel) at Beer-sheba, and invoked there the name of the Lord, the Everlasting God. And Abraham resided in the land of the Philistines a long time. (Genesis 21:33-34, Jewish Study Bible)
그리고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안에 한 타마리스크(에셀나무)를 심었고, 거기서 주님, 곧 그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불러 의지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필리스타인들의 땅 안에서 많은 날들을 머물렀다. (JSB화중광야역)
◆ Adele Berlin, Marc Zvi Brettler, Michael A. Fishbane. The Jewish Study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45.
'타마리스크'의 원어는 '에셀'로서 '타마리스크 나무'를 의미한다 (The word for tamarisk is 'eshel (ay'-shel) which can mean a tamarisk tree). 그리고 이 용어는 하나의 숲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숲은 아브라함이 기도를 위해 독거를 하였던 하나의 개인적인 정원과 같은 것이었다. 후에 숲들은 종교적 의식 및 기도의 장소로서 그리고 카나안과 이스라엘에서 만남의 장소로서 활용되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 <요한복음 17장>에서 마지막 크신 기도를 드리신 곳이 한 정원 숲이었다.
그리고 이 나무는 약 20년 후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번제용 나무로 베어져 쪼개졌다. (창세기 22:3). 그리고 이삭이 그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 위로 올라갔다 (창세기 22:6).
위 왼쪽 그림에서 이삭(그리스도의 한 완전한 전형)이 불사를 나무를 지고 가는 반면, 아브라함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한 완전한 전형)은 '검과 불'을 들고 있다:
(창세기 22:6)
And Abraham took the wood of the burnt offering, and laid it upon Isaac his son; and he took the fire in his hand, and a knife; and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 (KJV)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번제용 그 나무를 취하였고, 그것을 자기 아들 이삭 위에 지웠다. 그리고 자기 손에 그 불과 한 검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 곧 두 사람이 함께 갔다. (KJV화중광야역).
이것은 에덴동산 안의 '생명의 그 나무의 길'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한 검화염'을 연상시킨다:
(창세기 3: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s,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KJV)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담 그 사람을 쫓아내셨고, 그리고 에덴의 동산의 동쪽으로부터 생명의 그 나무의 길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분이 그룹들과, 저절로 두루도는 한 검화염을 머물게 하셨다. (KJV화중광야역).
위에서 '지웠다'는 신약에 와서 성취된다:
(요한복음 19:17)
And he bearing his cross went forth into a place called the place of a skull, which is called in the Hebrew Golgotha: (KJV)
그리고 그 분(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의 장대를 지고서, 히브리어로 골고다 곧 한 해골의 장소라 불리는 한 장소로 가셨다. (KJV화중광야역)
아브라함에 의한 이삭의 희생제물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완전한 전형>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고, 그에게 성지 안의 '모리아산'(Mount Moriah) 위에서 독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알리셨다. 이 <모리아산>은 예수님이 '올리브산'(Mount of Olives)의 <그 나무>에 달리신 바로 그 지역이었다 (창세기 22:4). 이 사건은 정확한 동일 지역에서 일어난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사건에서 비롯된 연출이었다. 이렇게 골고다는 이전에 역사 속에서 실연(實演)되었다.
아브라함이 심은 '에셀나무'(ESHEL TREE) 나무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찌하여 다른 나무들 가운데서 그는 그 나무를 선정하였는가? 브엘-세바의 근교 많은 곳에서 어떤 한 나무가 우뚝 서 있다. 멀리서 보면 그 우거진 모습이 마치 하얀 녹색의 베개들 같이 보인다. 그 짙은 그림자가 행인, 목동들과 그들의 양떼를 끌어들인다. 이것의 아랍어 명칭은 '아탈'(ATHAL)이며, 히브리어 '에셀'(ESHEL)과 너무 흡사하다. 그리고 라틴어로는 '타마릭스'(TAMARIX)이며, 영어로는 '타마리스크'(TAMARISK)라 불린다.
아침에 이 '타마리스크'의 그늘 속에 앉아 있노라면, 그 상쾌한 시원함을 느낀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 밑에서 두 눈을 들어 그 나무의 가지들을 쳐다보면, 그 연한 말단의 작은 가지들 위에 번쩍이는 작은 물방울들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될 것이다. 밤새 습한 밤을 보낸 후에 흥건하게 생긴 이 작은 물방울들은 정오를 향하여 증발한다.
이 '타마리스크'의 가지들에는 작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곧 작은 소금 알갱이들이 나무에서 배출되어 잎사귀들 속으로 스며든다. 밤에 차가운 공기 속에서 습기가 증가하기 때문에, 수증기들이 습기를 흠수한 소금 분자들로 만들어져서 작은 물방울들로 압축되어 버린다. 아침이 되고, 해가 공기를 따뜻하게 하면, 물은 증발되고, '타마리스크'의 가지들은 시원해진다.
◆ <창세기 21:17-34>. The Hebrew Bible. Berlin: Preussische Druckrei und Verlags-A.-G., 1931.
<창세기 21:33>
And Abraham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the LORD, the everlasting God. (KJV)
그리고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안에 한 에셀 나무를 심었고, 거기서 주님, 곧 그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불러 의지하였다. (KJV화중광야역)
And Avraham planted an eshel (tamarisk tree) in Beer-Sheva, and called there on the Shem of Hashem El Olam. (The Orthodox Jewish Bible)
그리고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안에 한 에셀 나무(타마리스크 나무)를 심었고, 거기서 주님, 곧 그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불러 의지하였다. (OJB화중광야역)
And Abraham, after planting a holy tree in Beer-sheba, gave worship to the name of the Lord, the Eternal God. (Bible in Basic English) <http://basicenglishbible.com/genesis/21.htm>
그리고 브엘-세바 안에 한 거룩한 나무를 심은 후에, 아브라함이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예배하였다. (BBE화중광야역)
히브리원어 '에쉘'(H815)=작은 숲(창세기 21:33). 에셀나무(사무엘상22:6; 31:13): 히브리어 성경을 코이네 헬라원어로 번역한 'SEPTUAGINT'(70인역)은 '아루란'(αρουραν)으로 번역하였다:
위 본문에서 왼쪽은 히브리어성경을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한 'Septuagint' 곧 '70인역'이요, 오른쪽은 그것을 영어로 번역해 놓은 성경구절이다:
και εφυτευσεν αβρααμ αρουραν επι τω φρεατι του ορκου και επεκαλεσατο εκει το ονομα κυριου θεος αιωνιος
And Abraam planted a field at the well of the oath,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the Lord, the everlasting God.
여기서 한 가지 발견된 것은 히브리어 '에셀'이 헬라어로 '아루란'(αρουραν) 곧 '하나의 들판'으로 번역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단한 통나무'(HARD WOOD)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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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성구]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한글개역개정)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능수버들을 심으고 永生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일흠으로 祈禱하며 (게일역)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안에 이르자 마자, 긴 여정을 위하여 단순히 아무런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나무들 보다 그늘이 더 시원한 것을 선정하였다. 더욱이 <에셀나무>는 뿌리가 땅 속의 깊은 물을 찾아 깊이 내려가기 때문에 열과 긴 마름에 곧잘 견뎌 낼 수 있다. 놀랍지 않게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생긴 두 민족, 곧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이삭의 후손들에 의해서 보존되어 있는 성경적인 이름인 <에셀나무>는 오늘날 브엘-세바 부근에 남아 있다.
아브라함이 <타마리스크> 한 그루 만을 심었을리 만무하다. <타마리스크> 가지는 축축한 토양에 심겨지면, 특히 모래나 황토에 심겨지면 뿌리들과 가지들을 신속하게 내린다. 첫 성장기에 물이 가용하면, 뿌리들이 계속해서 축축한 토양을 찾기 때문에, 다시 물을 대지 않아도 <타마리스크>는 우거진다.
이렇게 우리는 아브라함이 서너 그루의 <타마리스크>를 심었고, 숲 내지는 정원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타마리스크>는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따라서 <에셀>은 정원을 의미한다. 오늘날도 이 나무들은 이스라엘 지중해 연안 도시들에서 숲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http://www.jhom.com/topics/trees/eshel.htm>
모세는 중보자로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살려야겠다는 강한 의지로 여호와께 의지하여 간구했더니, 여호와께서 놋뱀을 한 마리(단수) 만들도록 계시한 것이다. 이 놋뱀은 반드시
장대(나무)에 매달아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함이 그 필요 조건이었던 것이다(민수기 21:8-9).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아닌가? 그 후 성경은 이대로 그 실제가 이루어졌으니, 그것이 '다 이루어졌다'(요한복음 19:30)하시고 죽으신 <골고다의 나무사건>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시력의 최대한 높이(가시거리)가 50큐빗(약 23미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은 시야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길이는 이미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에서 예표하는 방주의 너비인 것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풀이는 앞으로 <십일조>를 풀이할 때 언급될 것이다!!
이 '장대'는 '싯딤나무'(Shittim Wood)였다. 물이 없는 광야 안에서 자라는 유일한 나무로서 일종의 아카시아 나무에 속한다. 출애굽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싯딤나무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시내광야 안을 지나다 보면, 드문드문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나무로 언약궤를 만들도록 모세에게 명하셨다. (출애굽기 25:10).
예수님은 자신의 일자(수평)로 된 나무 <곧은 장대>(스타우로스/σταυροζ)를 <골고다>까지 지셨고, 그 나무에 못박히셨고, 그 못박힌 나무와 함께 '한 큰 올리브나무(A BIG OLIVE TREE)에 매달리셨다.
[마태복음 27:31-32/ 마가복음 15:21/ 누가복음 23:26/ 요한복음 19:17]
1. 나무 위에서 겪으신 모든 고통을 상징할 때는 <스타우로스>(σταυροζ/stauros)와 <스타우로오>(σταυροω)로 표현하였다:
1) 명사 <스타우로스>(σταυροζ)=범죄자들(죄인들)을 사형집행하는데 사용되는 <위를 향하는 곧은 장대, 곧은 막대기>
2) 동사 <스타우로오>(σταυροω)=범죄자들(죄인들)을 사형집행하려고 <위를 향하는 곧은 장대, 곧은 막대기에 못박다>
전통에 의하면, 로마 병사들에게 12가닥 가죽끈에 그 끝에 3개씩 예리한 철조각을 박았으니, 모두 36개의 철조각이 예수님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이사야 53:5). 게다가 그 분 머리 위에 가시관을 씌웠으니 예수님은 거의 기진하신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사, 하나님의 크로노스 시간 안에서의 인류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고자, 예수님은 그 무거운 '통나무'를 지시고 가시다가 쓰러지신다. 그리하여 구레네인 시몬이 대신 지고 골고다에 이른다.
<골고다>(GOLGOTHA)(마태복음 27:33. 마가복음 15:22)는 히브리어 <굴고레트>(H1538)에서 유래된 아람어로서, <해골><두 개골><계수>(사사기 9:53. 열왕기하 9:35)이란 뜻이다. 즉 <머리, 어깨, 목>까지 포함한다. 특히 영어의 <갈보리>(CALVARY)는 라틴어 <해골>인 <칼바리아>(CALVARIA)에서 유래되었다.
예수님은 길이가 약 23미터(노아방주의 폭/50큐빗)이 되는 <그 곧은 막대기>를 빌라도 법정으로부터 약 800미터 거리에 있는 올리브산의 골고다까지 지고 가시는 동안, 전통에 의하면 21번(성경에는 3번) 쓰러지셨다. 거기서 <그 곧은 막대기/통나무/장대)에 못박히신 후, 그 아버지의 집, 곧 성전이 마주보이는 동편에 있는 <한 살아있는 올리브나무>에 예수님이 매달리셨다!! 이 동일한 나무 위에 다른 두 행악자들도 함께 못박혔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이 땅 구덩이들을 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 이전부터 수 세기 동안 희생자들을 처벌하는데 '살아있는 나무'(LIVING TREES)을 사용하였다.
세 사람은 한 나무 위에서 자기 양손을 위쪽으로 들어 올린 상태에서 못박혔으니, 이는 <일곱 가지 금등잔대>(7 branched golden candlestick)의 하나의 완전한 모형임을 성취한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가장 강한 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The olive tree is one of the strongest trees). 올리브나무는 성경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빈번하게 언급되었다. 진녹색의 잎사귀부터 두껍고 커다란 나무 전체의 모습까지 아름다운 외형을 가진 나무로서 묘사되었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의 복주심(blessing)을 받은 나무로서 명맥을 이어왔고, 고대부터 현재까지 식용부터 건설용 목재까지 다양한 용도로 쓰여 왔으며, 세계 각지의 문화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홍수 후에 비둘기가 노아에게로 돌아왔을 때, 올리브 가지가 무성하였던 것이다. <로마서 11:13-25>에서 올리브나무는 유태인들의 영적 유산의 상징이다. 이제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과 복주심에 동등하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유태인과 이방인은 그 참다운 한 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성을 나타내는 그 영적인 뿌리로부터 동등하게 공급을 받는다!!
[올리브 나무/별도필독자료 ] 보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크쉴론>(ξυλον)이란 용어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필자도 2002년에 <십자가인가 나무인가> 주제를 놓고 풀을 때는 <크쉴론>(ξυλον)은 <살아있는 나무에서 베어내든지 꺾어낸 마른 나무>요, <형틀/교수대>로서 <스타우로스>(σταυροζ)와 동의어임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는 중에 어네스트 마틴 교수님의 저서 '골고다의 비밀들'(Secrets of Golgotha)를 입수하여 정독하는 중에(하단 부록 참조), 예수님이 죽으신 장소가 현행 영국 성공회측이 관리하는 '정원무덤'(The Garden Tomb)이 아니라, <올리브산> 남단에 있었다는 증거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 후로도 필자는 계속 연구를 거듭해 오던 중에, 최근 들어서 <예수님의 못박히심과 달려죽으심>의 상황이 별개였다는 근거를 성경 기록들 속에서 찾아내게 되었다. <사도행전 1:9-12>이다. 이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간 사도들에게 보이셨고, <그 아버지>께로 들리워지는 파노라마가 넘치는 장면이다:
1:9그리고 그 분(예수님)이 이 말씀들(부활하신 후 일어난 일들)을 전하셨을 때, 그들(사도들)이 지켜보는 동안, 그 분이 올려가셨고, 그리고 한 구름(증인)이 그들이 보이는데서 그 분을 받아들이더라.
1:9And when he had spoken these things, while they beheld, he was taken up; and a cloud received him out of their sight.
1:10그런데 그 분이 올려가실 때 그들이 하늘 쪽으로 주시하였는데, 보라, 흰 옷을 입은 두 분(천사들)이 그들 곁에 섰더라.
1:10And while they looked stedfastly toward heaven as he went up, behold, two men stood by them in white apparel;
1:11그 두 분도 말하기를, '너희 갈릴리의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늘 속 위를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로부터 하늘 속으로 올려가신 바로 이 분 예수는 너희가 그 분이 하늘 속으로 가심을 보아 온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였다.
1:11Which also said, Ye men of Galilee, why stand ye gazing up into heaven? this same Jesus, which is taken up from you into heaven, shall so come in like manner as ye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1:12그런 후에 그들은 올리벳(올리브)이라 불리는 그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아갔는데, 이 산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약 2천큐빗/약 1키로미터)에 있더라. (사도행전 1:9-12)
1:12Then returned they unto Jerusalem from the mount called Olivet, which is from Jerusalem a sabbath day's journey. (Acts 1:9-12, KJV)
그런데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스타우로스>(σταυροζ/stauros) 대신에 불쑥 <크쉴론>(ξυλον/xulon)을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무슨 의미 내지는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인가? 필자는 무척이나 상고를 거듭해 나갔다. 이제는 정리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먼저 사도 베드로의 증언을 보자:
1. 사도 베드로의 증언 (사도행전 5:30)
너희가 죽였고 한 살아있는 나뭇가지(크쉴론/ξυλον) 위에 매달았던 예수님을 우리 조상들의 그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셨도다. (KJV화중광야역)
The God of our fathers raised up Jesus, whom ye slew and hanged on a tree.
위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라는 말은 생략하고 모든 자에게 선고된 저주를 언급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신명기 21:23>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시체를 밤새도록 나무 위에 두지 말고, 다만 너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날에 그를 장사할지니라(이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 주 너희 하나님이 네게 한 상속으로 주신 네 땅을 더럽히지 말지라. (KJV화중광야역)
His body shall not remain all night upon the tree, but thou shalt in any wise bury him that day; (for he that is hanged [is] accursed of God;) that thy land be not defile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for] an inheritance.
위 본문에서 <나무>의 히브리원어 <에츠>(H6086)가 헬라원어로 <크쉴론>이다. <에츠>는 '동산 안에 살아있는 나무'(창세기 2:9) '숲'(창세기 40:19) '나무로 만든 우상'(예레미야 2:27) '땔감나무'(창세기 22:3,9) 재목, 널판, 막대기 등 그 용도가 다양하다. 헬라원어로 <크쉴론>도 이와 같은 용도를 대변한다. 보통 <크쉴론>은 '수목'(TREE/樹木/생명)이 아니라 '재목'(WOOD/材木/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누가복음 23:32>과 후기 헬라원어에서는 '수목'을 뜻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한 푸른 나무(크쉴론/ξυλον)에 이런 일들을 행한다면, 마른 나무(크세로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 (KJV화중광야역)
For if they do these things in a green tree, what shall be done in the dry?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4>에서는 '생명'이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 분(예수님)의 분부하신 말씀들을 준행하는 자들은 행복하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의 그 나무에서 (임하는) 권세를(능력을) 얻고, 그 성읍 속으로 향하는 그 문들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려 함이라. (KJV화중광야역)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that they may have right(delegated power) to(에피/επι) the tree(크쉴론/ξυλον) of life, and may enter in through the gates into the city.
2. 사도 바울의 증언 (사도행전 13:29)
그리하여 그들이 그 분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하고 난 후에, 그들이 그 분을 그 나무(크쉴론/ξυλον)로부터 취하여 내렸고, 그 분을 한 돌무덤 속에 안치하였는데 (KJV화중광야역)
And when they had fulfilled all that was written of him, they took him down from the tree, and laid him in a sepulchre.
본문에서도 <크쉴론>은 하나의 <나무>를 의미하지 않고, <사도행전 5:30; 10:39>과 <갈라디아서 3:13>에서 언급된 <재목>(WOOD/材木/죽음)을 뜻한다.
이러한 신약성경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문자적 의미는 일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한 십자가>(A CROSS)가 아니라 <한 곧은 막대기>(A STAKE) 위에서 못박혀 달려 죽으셨다고 믿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믿고 있는 그 분의 양팔은 '뻗침'(outward)이 아니라 머리 바로 위로 '묶임'(fastened)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맺으면서]
성경신자의 유일한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시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해준 '그 복음'의 진수(眞隨)이기도 한다 (골로새서 1:5).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도 두 가지 모습으로 오신다고 분명하게 알리고 있다.
첫째는 '도적같이 오심'이요,
내가 너희를 고아들처럼 남겨두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리라. 이제 잠시 동안만 지나면, 그 세상이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 것임이라. (요한복음 14:18-19, KJV화중광야역)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면서 예수님은 그들을 '작은 아이들'(τεκνια/요한복음 13:33 주 참조)이라고 부르시다가, 지금은 그들을 '고아들처럼'(ορφανος) 남겨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분은 그들에게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은 부활하신 그 날에 영광받으신 몸으로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리고 오순절 그 날에 그 분이 그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심으로써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분은 자신의 부활과 그 부활의 영향을 전하신다. 머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그 분은 '현재'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부활을 '현재'라고 전하신다. 그런데 자기 제자들에 관하여는 '심판의 그 날'(the Day of Judgment)까지로서, 자신의 부활의 영향을 '미래'(future)라고 전하신다.
이제 얼마 안 있어, '그 세상'(the world )은 그들이 보고 싶어도 더 이상 그 분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제 '죽은 자들로부터'(from the dead) 일으켜지시면, 그 분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심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선택되어진 '증인들'(witnesses)을 향하여 나타나시게 된다!!:
모든 백성에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선택되어진 증인들을 향하여, 곧 그 분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후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신 우리를 향하여 나타나신 것이라. (사도행전 10:41, KJV광야역)
그 분이 부활하신 후, 그 제자들이 성령님이 오심으로 '빛을 받게 되었던 것이니'(enlightened), 곧 그들이 좀처럼 깨닫지 못하였던 주님의 '그 가르침'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토록 여러 차례 설명해주셨던 그 가르침을 이제서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Francis Henry Dunwell, A commentary on the authorized English vers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compared with the Sinaitic, Vatican, and Alexandrine manuscripts, and also with Dean Alford's revised translation, London: J. T. Hayes, 1872, p.320).
둘째는 '공개적으로 오심'이다. 이것은 심판의 대상에게 임하시는 오심이요, 그 때와 그 시를 모른다. 애곡하고 통곡하리라 분명히 경고하신다. <계속됨>
[부록1] 도움을 주신 '어네스트 L. 마틴' 교수님!!
다음의 글은 '어네스트 L. 마틴'(Ernest L. Martin) 교수의 역작인 '골고다의 비밀들'(Secrets of Gogotha)에서 인용한 것이다. 필자가 2001년 9월 11일, 뉴욕 사건을 중심으로『하나님의 카운트다운』이라는 제하의 성경에세이를 작성해오던 중, 2002년 1월 1일 우연히 인터넷에서 마틴 교수의 저서를 논평한 글을 대하게 된다. 지금까지 알려져 오고, 행해지고 있는 구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한 '묘지정원'(Garden Tomb)에 있는 골고다가 성경적으로 풀어봐도 제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나무'(The Tree)에 달려 돌아가신 바로 그 자리는 올리브산(감람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1999년 11월에 예루살렘을 순례해보았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http://www.askelm.com/books/book001.htm.
평소에 필자에게는 풀리지 않은 것이 있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그 통나무'(스타우로스/σταυροσ)의 크기와(앞으로도 필자의 성경번역 및 구절 풀이에서 십자가라는 용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니, 이 점을 감안하여 읽어주시기 바란다).
둘째는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현장까지의 거리가 약 800미터로서 그 저주의 '그 통나무'를 메시고 가시면서, 예수님께서 21번 쓰러지셨다는 사실이었다. 그 중에서 둘째 비밀을 풀어준 책이 바로 마틴 교수의 책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풀려고 예루살렘을 30번 방문한 집념이 강한 교수였다.
필자의 이러한 안타까움을 전해들은 제자 디모데박의 도움으로 1월 19일 입수가 된 것이다. 마틴 교수님은 1월 4일(현지시각) 심장마비를 일으켜 퇴원 후 쾌유되었는데, 그 후로 저술을 하는 도중에 1월 17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1월 25일 향년 70세로 오레곤주 포트랜드 소재 윌람미트 주립묘지에 영면하셨다.
필자에게는 너무도 귀한 분이며, 그의 저술은 귀한 책이다. 조금 일찍 그 분을 알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왜냐하면 지금 정독 중인 책을 읽고는 곧 질문을 드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죄가 그 문 입구에 눕는다'(7절)과 '노드 땅'(16절)이 시원하게 풀렸기에, 성경주제풀이를 통해서 밝히고자 한다(pp.2-5). 앞으로도 광야 안의 성막, 솔로몬 성전의 위치와 높이, 그리고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그 나무>에 관하여 본서를 자주 인용되게 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20227) (200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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