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어스 진영의 분열과 대안

진실탐구/평평지구|2019. 5. 1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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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징조] 카톨릭과 개신교 배도의 시대

휴거소망|2019. 5. 11. 23:46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2:3)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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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징조] WEA는 혼종으로 태어난 잡종이다!

휴거소망|2019. 5. 1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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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사기극의 진실과 인구감축 계획

세상보기/음모론|2019. 5. 1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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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프란치스코 교황] 하나님은 당신을 동성애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휴거소망|2019. 5. 11. 16:25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롬1:27)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레20:1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고전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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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가 감사하게 느껴질 때 / 스크랩

묵상/Word-God|2019. 5. 11. 16:22

 

◑거룩함에 참예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하나님이 과연 복을 주시느냐?

일이 잘되게 해 주시느냐?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게 막아주시느냐?’ 에 둡니다.

 

그러면 믿음은 종잡기 어려울 정도로 요동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금방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지만

어려움을 겪고 실패를 하고 징계를 당하는 일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성공, 축복이 아닙니다. 거룩함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서도 징계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히12:1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은,

단순히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천국가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온 것만도 아버지에게는 큰 기쁨이지만, 아버지의 더 큰 기쁨은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아들답게 반듯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돌아온 탕자라는 것에 머물면 안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점점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십니까?

작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까? 3년 전, 5년 전과 몰라보게 달라졌습니까?

 

만약 자신이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면,

죄 안 짓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여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12: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심을 믿는다면,

돈 벌고 성공하기 위하여 살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을 왜 목표로 삼습니까?

죽기 살기로 죄와 싸우며, 거룩하기 위하여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능한 자로 평가받을까봐 안절부절합니다.

세상에서는 무능한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무능하면 징계를 받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죄를 지어도 유능하면 받아줍니다.

정치인도 기업인도 군인도 유능하고 사회에 공헌한 것이 크면

어느 정도 면죄부를 받습니다. 적당히 죄를 지어야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무능한 것을 징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무능한 자를 일부러 택하여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전1:27~2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못한 것, 죄에 대하여 징계하십니다.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능하여도 바로 징계하십니다.

 

▲다윗이 자신의 충복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아주 야비한 방법으로 머리를 써서 그 부하를 죽입니다.

 

당시 왕권 사회에서 왕이 부하의 아내 하나 취한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처절한 매를 가하십니다.

밧세바에게서 낳은 첫 번째 아들을 낳자마자 죽습니다.

그렇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잘 생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습니다.

압살롬은 궁중에 있던 아버지의 처첩들을 백주 대낮에 옥상에서 범합니다.

비참할 정도의 매를 다윗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기에 더욱 무섭게 치셨습니다.

다윗이 세상 왕처럼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럴 가능성 자체를 막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하고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높아지고 부자되고 성공하면 매 맞을 확률이 더 큽니다.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징계하십니다.

 

한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처럼 귀하게 쓰임 받던 분들이

은밀히 죄를 짓다가 죄가 드러나, 하루 아침에 고꾸라진 것을 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주님이 그 종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하셨구나!’ 깨달아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비참하지만 그들에겐 잘 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여기서 회개할 기회를 얻었으니 말입니다.

 

징계를 받지 않은 사람, 은근히 다행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야 비로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면

차라리 그 실족한 종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돈 잃고, 건강 잃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사실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였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시는 이유는

거룩하지 못하고, 죄짓고 살면 구원의 복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죄짓는 것은 자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누가 이 예배당에 들어와서

강단 위에서 술판을 벌리고, 담배 연기로 가득하게 하고, 음란한 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멱살잡이를 하고 싸우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저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크게 벌을 받으려고 저렇게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이 예배당이 아니라 우리 몸입니다.

그런데 술 취하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음란한 짓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은, 마귀로부터 끊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깨우칠 수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못 알아들으니 어떻게 합니까?

 

다윗도 못 알아들으니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셨습니다.

발람선지자도 알아듣지 못하니, 자기가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통하여

책망 받는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 그런 사람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마귀가 무조건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흥미 있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는 자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는 분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하고 싶은 것은 못하게 하고 안된다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 하고 그러다가 툭하면 징계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무섭습니다. 마귀는 친구입니다.

 

이런 사람은 징계가 필요합니다.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죄는 재미있고, 거룩함은 재미없는 삶이라고 속삭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입니다. 완전히 세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죄짓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달아야 벗어나려 하게 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19금 영화를 보고 회개한 것에 대하여 페이스북에 썼을 때,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너무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는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죄, 죄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된 성인물로 인하여

지금 어떤 결과가 빚어지고 있습니까?

 

엄청난 음란물 홍수에서,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음란물에 빠져,

상상도 안되는 성범죄에 고통당하고, 가정이 파탄되고 있습니다.

 

제가 24 시간 예수님만 바라보면 사는 데, 변화가 있습니다.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목회에도 그렇습니다.

 

“우울증 아니냐?”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제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을 보면.. 우울증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 때 무엇 보다 감사한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11절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평화는 전쟁이나 무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5절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통하여 죄를 끊어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실 때,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인지 확신할 수 있나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 모르니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한 사람 회개케 하기 위하여, 지중해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그 때 요나는 깨달았습니다. ‘나 때문이구나!’

그래서 “바로 나 때문이요!” 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도 살고, 선원들도 다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말 확실히, (징계를 통해) 깨닫게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얼마나 두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징계를 받기전에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또 조심할 것은, 징계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12:5절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본문은 낙심에 대하여 길게 다릅니다.

 

낙심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돈을 가져가고, 건강을 치시고, 시련을 주실 때,

돈 잃은 것, 건강 잃은 것 시련이 닥치는 것만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죄를 끊어 버리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징계는 끝납니다.

깨달았는데 왜 징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징계는, 사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징계가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징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내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아파서 죽어가는 아들을 징계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징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사생자가 아니고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6절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

 

7절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8절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당할 때, 오히려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12-13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제 삶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경험은, 군목 훈련 부상이었습니다.

이유를 몰랐습니다. 단순한 사고였고 운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그리 방탕하지도 않았고 큰 죄지은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제 죄가 깨달아졌습니다.

 

목사면서도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육신의 아버지만 못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아지는 것은 더 비참하였습니다.

제 소원은 이왕 목사가 되었으니 유명한 목사 성공한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큰 교회를 담임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내면의 온갖 죄가 다 드러났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모범생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지옥에 갈 죄인임을 비로서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그 때, 다리 부러진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리 부러진 것을 감사했습니다. 다리를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장애인이 되어 거룩하게 사는 것이,

두 다리 멀쩡하여 제 성공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진짜 종이 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의 목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루 밤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 때부터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일할 교회도 없었고, 훈련소만 3년 해마다 들어갔고

그러나 마음이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군목시절, 부임한 부대 연대장은 제게

“목사님께서 낙심하고, 포기하실까봐 가장 염려됩니다.”

그동안 부대 여건 때문에 낙심한 목사님을 많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부끄럽지만 군단장 표창도 받았습니다.

광주통합병원에서 밤새 울던 일을 생각하면 어디가나 감사한 것뿐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거룩한 삶을 삶의 목표로 삼아 보셨습니까?

그런 적이 없었다면 이제 결단해 보십시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징계 받지 않고도 깨달았다면 왜 징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서워할 것은 징계가 아니라 죄입니다.

그러면 징계가 없습니다. 징계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혼자하면 안됩니다. 거룩한 손을 서로 잡고 연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거룩한 공동체를 만듭시다.

 

전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잘되는 것, 복 받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얽매인 죄를 벗어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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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사명입니다 / 십자가 설교 시리즈, 스크랩

묵상/Word-God|2019. 5. 11. 16:20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 마디로 말하면 고난입니다.

물론 그 십자가의 고난을.. 고통스럽게만 여기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 끓어넘쳐서.. 기꺼이 그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사명자에게 있어서,

십자가, 그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몸’에 대한 사랑이 끓어 넘쳐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면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 속에서 고난이라는 현실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고난이 없다’ 라고

이렇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경을 일면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에게도.. 반드시 고난을 주시고,

심지어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일반 신자에게도.. 고난을 주시는데요..

이래 저래 성도는.. 고난을, 그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원치도 않는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고난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구원을 이루는 고난

 

고린도후서 4장 17절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한 것이,    *가벼울 경輕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무거울 중重

 

우리가 지금 받는 환난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 환난의 가벼운 것을 통과한 사람만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한 것, 우리가 받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도 않는 ‘고난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성도에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어주셔서,

우리를 ‘구원의 완성, 성숙,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2. 또 복음 전파자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예수님을 잘 믿어서 고난이 없다.’

그런 말도 30% 맞지만 70% 틀린 말입니다. 왜 그에게 고난이 없는가요?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남들처럼 큰 고난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이 아니거나, 그를 구원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자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고난이 없지요.

 

로마서 1장에도 사람들이 욕심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말씀이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런 사람은 고난이 없을 수 있습니다. (없지는 않고, 고난이 적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그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밝은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가운데서 하늘로서 이런 음성을 들었는데

‘그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여주었노라’ 행9:16

 

이것은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만약 바울에게만 적용된다면, 꼭 성경에, 이 구절을 명시할 필요가 없었겠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은, 바울처럼, 많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복음 전파는.. 반드시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군’이 아니라요.

 

그게 성경적 방식이고,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무력과 힘을 앞세운 복음전파는.. 사실은 복음전파가 아니지요.

예수님이 먼저 그러하셨듯이

그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하지만,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경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지 않는 삶’은, 현재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아서, 사업도 잘 되고, 자녀도 잘 된다고 말하지만

그런 면이 30%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잘 믿고 복음 전파 사업에, 해외 선교 사업에 투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과 같이 ‘얼마나 많은 고난의 길을, 피하지 못하고, 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고난이고, 고난은 사명’입니다.

지금 이 메시지의 제목이 ‘고난도 사명이다’ 인데요,

 

‘사명 Commission’이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답게 들립니까?

장밋빛 같아 보이고, 새파랗고 청명한 하늘처럼 아주 멋있고 고상하게 들리는 말이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 그 아름답고 고상하게 보이는 그 단어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속 본질은.. ‘사명은 곧 고난’인 것입니다.

 

딤후1:8절에도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야, 네가 가게 될 복음 전파의 그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 ..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마10:16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불과 15년 전에 한국의 어떤 선교사가, 터키에서 선교사임이 발각되어서

일정 기간 감옥에 갇혀서, 또 폭행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그 선교사가 풀려나서, 한국에 돌아와서 간증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감옥에서 구타를 당한 그러한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혹시 그분께 정신적 충격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지요.

 

여기는 해외 선교지가 아니라서,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뭐 그래도 복음을 전하는 중에, 생활비가 떨어져서

바울처럼 굶고 춥고 헐벗는 일을 당하는 이런 ‘생활고의 고난’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저는 어느 날, 위 구절을 눈을 씻고, 몇 번이나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성경을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 같이 복음전파에 충성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여태껏 들었던 기복주의적 설교에 의하면,

복을 받아도, 정말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히 받아야 할 터인데..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바울이 ‘굶고, 춥고, 헐벗었다니요?’

(그래서는 안 되지만) 정말 따지고 싶습니다. ‘저기, 실례지만.. 좋으신 하나님 맞나요?’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없으면,

우리 일반 신자나, 사역자의 삶에.. 많은 딜레마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너무나 기복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뻔한 현실(고난)을 보고서도.. 납득이 되지 않고, 시험에 들고, 신앙성장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성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3. 신자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집니다.

(위 ▶1번의 연장선상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엄마나 아빠들은 자녀를 키울 적에,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면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래서 흔히 ‘딸 바보’도 있고, 뭐 ‘아들 바보’도 있지요.

 

어린 자녀들이, 다가와서 엄마 아빠 품에 편히 안기는 것은,

부모들로서는 정말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지요.

‘하나님께서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 품에 안기면,

정말 매우 기뻐하시겠구나.’

 

그런데 이제 자녀들이 조금만 크면, 부모에게도 잘 다가오지 않듯이

성도들도 조금 지나면,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잘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때때로 우리가 너무 멀리 벗어나 있을 적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다가오게 하십니다.

 

병에 걸리기도 하시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도 하시고,

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게 하셔서

정말 이 성도가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도, 57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천국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에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오래 살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빨리 소천하신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그 분은, 평소에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편안한 때, 젊었을 때, 받았던 모든 은혜는 거의 헛되거나 아주 작았다.

그러나 내가 고통 받고 괴로웠을 때 받았던 그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웠다.’

 

‘스펄전 목사님 같은 신실한 분께, 무슨 고통이 있었을까?’ ..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목사님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편안하고 즐거웠을 때 받았던 은혜는, 작거나 헛된 것이었고

고통당하고 괴로운 시간에 받았던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길을,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수년간 고생한 코리텐 붐 여사는, 후에

그 수용소 시절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 했습니다.

 

‘내가 붙잡고 의지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을 때

그제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음을!’

 

코리 여사는, 평소에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까지 가깝지는 않았는데

정말 그 수용소에 들어가서, 그 어려운 가운데서

 

예수님이 정말 자기와 함께 하시고, 내주하시고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그러한 가운데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성도가 고난을 당할 적에 불신자에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24:14절에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된 후에 그제야 주님이 오신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증거(마르투리온) 라는 말은,

행1:8절에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와 같은 말입니다. *마르투스

 

이 말의 뜻은, 그냥 뉴스 전하듯이, 어떤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자기 삶의 증거로.. 그 사실이 확실한 것임을.. 몸으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즉, 성도가 ‘증거’(마24;14)를 하거나 ‘증인’(행1:8)의 삶을 사는 것은

(위 두 구절 말고도, 신약성경에 몇 구절이 더 나옵니다.)

-말로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증거로서, 자기 생활로서 증인의 삶을 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세상에서, 자기 신앙 지킴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지만,

꿋꿋이 참고 이겨나가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는 것이에요. 전도가 되는 것이에요.

 

일례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고난을 당했지만

밤중에 그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했을 적에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어요. 행16:25

 

일반 수인들은 감옥에 갇혀서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

성도인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증인’이 되고, 그 삶이 ‘증거’가 되어서

실제로 빌립보 감옥에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불신자들은 그것을 못 본 척, 안본 척 하면서도

자기들의 마음이 요동 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 저것이 기독교 신앙이구나!’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미리 하셨습니다.

마10:18절 ‘또 너희가 나로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전도의 기회, 증거의 기회’가 될 것임을,

예수님이 미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너희가 그런 일을 당할 적에.. 당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불의한 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적에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여 주셨는가?’ 하고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100 배 복은 고사하고, 30배만 주셔도 좋겠는데

30배의 복은 커녕, 오히려 어려움과 환난을 당하게 하실 적에는

그 일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행1:8절이 이루어지고, 마24:14절이 이루어지는 기회인 것이에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된 후에, 예수님이 오시고

너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증인, 증거가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잡히고, 고생하고, 괴로움과 핍박을 당하고..

이러할 적에

세상 사람들에게, 임금들과 왕에게.. 복음이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희한한 복음전파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마10:18절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가이사랴 로마 군대안 감옥에서 2년,

후에 로마로 이송되어, 로마 가택연금 2년,

그런 식으로 <증거, 증인>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그래서 고난이 곧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곧 신자의 ‘사명’이고,

‘사명’이 뭐냐?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 = ‘사명’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복주의 신앙에 지난 50년간 물들어서

직분자가 되는 것은, 50년 전에는, ‘고난의 길을 가는 길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요즘에는 다 ‘축복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 안수, 장로 장립, 권사 임직을 할 적에,

‘이제는 장로님 되시고 권사님 되시면,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덕담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그렇게 직분을 맡음으로써

‘더욱 더 증인의 삶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증인의 삶은 무엇인가 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는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요, 직분자/사역자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바울의 고난을 통해서, 많은 주변 동역자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빌1:14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박을 당했는데

그의 결박을 통해서 다른 많은 형제들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자기가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해서 갇혀있는 그것이

다른 많은 형제들에게,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흔히 전쟁터를 다룬 영화를 보면

다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면, 겁을 잔뜩 먹고 있는데

동료 한 병사가 부상을 당하거나 죽으면

다른 병사들이 열 받아서, 갑자기 총탄이 쏟아지는 적진을 향해 돌진하게 되지요.

 

      성도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많은 다른 성도에게 자극이 되고,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 왔다가

선교도 제대로 못 해보고, 얼마 못가서 질병에 걸려서 순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에 감동을 받아서

호주에서 선교사들이 순차적으로 한국으로 건너 왔는데

다 합하면 80명에서 120명이나 되는 그러한 수 십 명의 다른 호주 선교사들이

데이비스 선교사의 질병으로 인한 순교에 열을 받아서

한국에 와서, 부산 경남 지역에, 놀라운 선교의 열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도 1997년에, 아프간에서 배형규, 심성민 선교사의 순교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크게 한 번 각성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5. 천국에서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가라지는..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떨어져 나가지만

알곡 성도는..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는 ‘비교’입니다.

현재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비교를 해 보면,

우리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차 영광’.. 둘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물건을 사기 전에, 늘 비교를 해봅니다.

내가 가진 돈 만원의 그 가치하고

저 물건의 가치하고 비교를 해서

만원을 줘도 괜찮겠다 싶으면.. 사는 것이지요.

 

나는 만원을 냈는데, 저 물건의 가치가,

눈짐작으로 보았을 때 오천 원 밖에 안 된다.. 그러면 그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지금 고난당하는 이 고난의 총량, 가치가 얼마인가?’,

그리고 ‘장차 내가 천국에 가서 받을 그러한 영광이 얼마인가?’

이것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 로마서 8:18절입니다.

 

그렇게 비교할 적에는 우리는 능히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훨씬 이익 보는 거래이니까요.

 

이런 말씀을 유념하셔서, 베드로서에 나온 것처럼

‘너희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적에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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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저울 /공정한 추(잠11:1)

 

5월 열 한번째 날 잠언


 거짓된 저울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공정한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1:1)


♡♡♡ 사람들을 속이려고 서로 다른 추와 서로 다른 되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죠.(신25:13-16) 특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재판을 할 때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추를 사용해야 하죠.(레19:35-36)

  십일조와 교회 출석과 교회 봉사에 대해서는 일 년에 수없이 강조하며 설교하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와 주의 다시 오심과 그리스도인의 일상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죠.

  성경 기록에서 십일조와 교회 출석과 교회 봉사에 대한 언급이 한번이라면, 주의 다시 오심은 400번 언급되며, 그리스도인의 일상 삶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300번 언급되죠.

  하나님께서 강조하지 않는 것들을 강조하는 것은 거짓된 저울을 사용하는 것이죠. “속임수로 저울을 틀리게 하고 밀을 파는 것(암8:5)”과 같구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도 서로 다른 추를 사용하는 것과 같죠.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모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된 저울과 서로 다른 추를 사용하는 가증한 자가 되지 않으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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